●●●해운보증기구 설립이 맥 빠진 모습이다. 최근 산업연구원은 해운보증기구 설립에 관한 연구용역 보고서를 마무리 지었다. 이 보고서는 해운보증기구의 역할을 후순위 보증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자본금 규모는 민간 2800억원, 공공 2700억원 등 5500억원으로 설정했다.
해운업계는 해운보증기구 설립 시 반드시 도입돼야 하는 기능으로 대략 3가지를 요구해 왔다. 후순위 대출보증과 선박은행(토니지뱅크), 잔존가격 보증(RVI) 등이다. 세 가지 기능들은 불황기 국내 선사들의 역행 투자를 가능하게 하고 선박의 해외 매각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 지원책으로 꼽힌다.
이중 선박은행은 대출원리금 상환이 제 때 이뤄지지 않아 부도가 날 경우 해운보증기구가 해당선박을 회수하되 즉시 매각하지 않고 보유하면서 운용하다 가격이 오르면 파는 기능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시절 가동됐던 구조조정펀드(캠코펀드)가 비슷한 방식을 취했다.
RVI는 일반 대출보증과 달리 선박의 잔존가격이 실제 상환금액의 일정비율 이하로 하락했을 때 향후 대출금 상환을 보장하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경기 악화로 중고선 가격이 급락해 많은 선주들이 은행들로부터 추가담보나 조기상환을 요구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해운사에 큰 힘이 될 수 있는 기능이다.
하지만 연구용역보고서는 3가지 기능 중 후순위 대출보증만을 취사선택했다. 선박은행은 보증보험형태로 설립되는 해운보증기구 특성상 현행 보험법에 위배된다는 점을 들어 불가 판정을 받았다. RVI 기능도 기금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정책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보고서가 해운보증기구의 중요한 2가지 기능을 배척한 건 축소된 자본금 규모와 무관치 않다. 당초 해운업계는 해운보증기금의 운용 규모는 2조원 정도가 적합하다고 목소리를 내 왔다. 지난해 선주협회 발주로 법무법인 광장에서 수행했던 연구용역에서도 이 같이 판단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2월 금융위가 해운보증기금을 보증보험 방식의 해운보증기구로 형태를 바꿔 설립한다고 발표할 때 부산 지역 국회의원들은 자본금 규모는 5500억원이 될 것이라고 일부 언론에 밝혔다. 당시 해운업계는 자본금이 줄면 해운보증기구의 기능도 크게 후퇴할 것이라고 우려했고 정부는 자본금이나 기능은 확정된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번 연구용역 결과를 놓고 볼 때 해운업계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처음부터 금융위가 자본금 규모를 정해 놓고 해운보증기구 설립을 추진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보고서는 대폭 축소된 자본금 규모로도 해운업 지원은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해운보증기구가 후순위 대출보증으로 20년간 4조4700억원의 선박금융에 관여할 수 있다는 추정에 근거한다. 평균 선박 건조비용을 척당 6000만달러로 따져 연평균 34척, 20년 간 총 744척의 선박 신조를 지원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해운업계는 해운보증기구 설립이 해운업 불황에 대비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들어 선박은행과 RVI 기능은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련의 사례를 놓고 볼 때 해운산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몰이해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대통령 공약사항이었던 선박금융공사는 없던 일이 된 지 오래인 데다 해양수산부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해운보증기금은 법적 문제를 이유로 보증보험형태로 크게 약화됐다. 보증보험마저도 당초 약속했던 기능들이 대거 거세된 채 ‘절름발이’로 운영될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다.
금융당국이 해운업을 외면한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해운보증기구에서 선박은행과 RVI를 지원하지 못한다면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올해 기능이 끝나는 캠코선박펀드의 연장이 한 방법일 수 있다. 정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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