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영 함부르크항만청 한국대표 |
일요일 아침,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콩나물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차가 많았지만 운 좋게 길가에 자리가 나서 그럭저럭 주차를 하고 언제 먹어도 개운한 콩나물 해장국을 맛있게 즐겼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아침부터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이 기분 좋게 차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차 앞에 네 명의 아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가로서서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운전하던 아내는 경적도 울리지 않고 속력을 줄여 걷는 속도로 그 뒤를 따라갔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내가 답답해져서 윈도우를 내리고 아이들을 향해 무어라 이야기 하려고 하자, 아내가 황급히 나를 제지했다. “아무 소리 하지 마! 좋은 아침에 기분 상하지 말고….”
골목길은 아직 70여 미터나 남아있었다. 내가 아내에게 “길을 막지 않고 한 쪽 옆으로 붙어서 일렬로 걸어가면 차도 지나갈 수 있고…” 라며 주장을 펴자 아내가 또 내 말을 막았다.
우리 둘이 하는 말이 앞에 가는 아이들에게도 들렸을 텐데 아이들은 힐끔힐끔 뒤돌아볼 뿐 오히려 더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고 그 사이 내 뒤에는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한 차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차량행렬을 뒤에 거느린 채 골목 끝까지 변함없이 늠름한 자세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침내 차가 골목을 벗어나 큰 길로 들어서 달릴 수 있게 됐지만 어쩐지 나의 기분은 상쾌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나는 아내와 이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마음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침묵하며 골목을 빠져나오는 사이에 나는 아이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눠 봤던 것이다.
아이들은 초등학생 둘에 중학생 둘인 것 같았는데 분명히 자기들이 정당하다는 확신 하에 그러는 듯 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장난으로 그런다고 지례 짐작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확신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내가 길 좀 비켜달라고 하면 분명히 그들은 ‘보행자 우선’을 얘기 했을 것이다. 내가 ‘차도 가게 일렬로 서서’를 얘기 했다면 그들은 ‘그래도 보행자는 안전치 않다’고 했을 것이다. 사실 좁은 골목에는 양쪽으로 차량들이 주차돼 있어서 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공간밖엔 없지 않은가?
만일 그 때 아내가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히 화난 어조, 아니면 명령조로 그 아이들에게 “차가 가게 일렬로!”를 외쳤을 것이다.
그랬을 때 그들이 조리 있게 위와 같이 답해 왔다면 아마도 나는 힘없이 “요즈음 아이들이란…” 하며 한 번 참고 말아버렸을 테고 말이다.
교통 혼잡으로 길이 막히거나 특히 막히는 골목길을 갈 때에는 누구나 짜증부터 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막히는 사이사이를 걸어서 갈 수도, 그렇다고 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운전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차도 다니고 사람도 다니고 자전거나 리어카도 다 함께 지나다니는 골목에서 운전자 위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점이라고 생각됐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골목길이 갓길주차를 해놓은 차들과 일방통행이건 쌍방통행이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차들로 꽉꽉 막혀 사람이 쾌적하게 걸어 다닐 수 없게 돼 버린 것은 보행자 입장에선 얼마나 짜증나는 일이겠는가?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역시 아내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음 한편에 ‘한 편에 일렬로 지나가주면 보행자나 운전자 양방이 좋은데 왜 이 안이 받아들여지지 못 하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보행자우선’이라는 교통질서에서 보행자가 양보하지 않는데 반대편에 있는 운전자가 보행자의 양보를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보행자 스스로가 모두를 위해 양보할 때만 이것이 미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 이것이 마음에 여운으로 남는다. 이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나마는 아마도 이것은 우리사회가 좀 더 성숙해 져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
많이 본 기사
0/250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