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5-17 14:34

부산/오사카 - 카훼리를 타다(3)

저녁 7시쯤 되자 선내 스피커를 통해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점심을 부산으로 내려오는 새마을호 식당 차에서 대충 해결했기에 무척이나 배가 고프던 터라 얼른 식당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장유유서(長幼有序)라고, 단체 관광객으로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먼저 식사를 하시고 일반 승객들은 순서가 그 뒤로 잡혔다. 고픈 배를 움켜 쥐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TV를 틀었다.
한국 영해 내에서 곧잘 잡혔던 YTN 채널이 사라지고 일본측 방송만이 잡혔다. 배가 고프다는 간절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알아 듣지도 못하는 일본어 방송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려 했으나 이내 청각은 꼬르륵거리는 소리에 집중되어 방송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 부는 갑판으로 나가 보았자 전후 좌우를 아무리 훑어 보아도 눈에 걸리는 것 하나 없는 아스라한 수평선 뿐이라 그 또한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일 터. 궁여지책으로 선내 매점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여기서도 그저 어쩔래 하고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이 첫 출항이라 면세점들이 아직 영업을 개시하지 않았고 한 쪽 귀퉁이에 자리한 매점에서는 맥주 등 음료를 팔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엎드려 있으면 나을까 싶어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화투 치시던 할머니께서 찔러 주셨던 젤리 하나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이게 어디랴 싶어 얼른 껍질을 까서 입 속으로 털어 넣는다.
과자를 빼놓고는 살 수 없는 내가, 어쩌다 이 긴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 귀한 양식을 까먹었던고?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 들었다.
이미 배 떠난 뒤에 후회해 본 들 무엇하랴마는…
아직 식사를 하시지 않은 학동, 재송, 소문, 은빛, 서대신 노인 대학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지금 식당으로 내려와 주십시오’ 안내방송이 또 한 번 흘러나왔다. 시계 바늘은 어느 새 8자를 넘어서고 있었다.
조금 있자니 옆 방에서 식사하러 가자는 신호가 왔다. 얼씨구나! 얼른 식당으로 내려 갔다. 홀에는 이미 식사를 마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앉아 계셨다.
앰프 시설이 설치되고 마이크를 잡으신 오늘의 사회자 할아버지께서 무대 중앙쯤 되는 곳에 서 계셨다.
오늘 밤 8시 30분에 아주 재미있는 행사가 있다고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는 우리에게 가이드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셨나 보다.
지명되신 할머니는 수줍어하면서도 사람들을 헤치고 무대 중앙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신다.
박수로서 격려하시는 친구 할머니들, 이미 노년기에 접어 들은 분들이시지만 젊은이 못지 않은 열정과 뜨거움이 느껴지는 광경이다.

홀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시선을 주고 있자니 식당 문을 통해 제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선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약간은 말랐다 싶은 체형의 손 재봉 선장(만 44세).
승무원 38명을 포함, 총 428명이 탑승한 ‘팬스타 드림’을 일본까지 몰고 가는 말 그대로 우리의 ‘캡틴(선장)’이었다.
해양대학교 항해학과 79학번으로 팬스타라인닷컴에 합류하기 전, 현대상선에서 ‘Hyundai Independence’ 등 컨테이너선을 몰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볐다고 하는 선장 경력 9년 차의 손 선장은 ‘선박의 꽃’이라 불리는 크루즈를 몰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으며, 실제로 현대상선에서 금강선 항로에 금강호가 취항할 때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원서를 내 보았지만 아쉽게도 탈락하고 말았다고.
그러하기에 준 크루즈에 해당하는 ‘팬스타 드림’을 몰게 된 것이 손 선장에게는 기쁨 그 자체이다.
팬스타측에서는 팬스타 드림 선장을 물색할 때 고속선을 몰 수 있어야 하고, 빡빡한 운항 스케쥴도 견뎌야 하며 일본지역을 운항해 본 경험이 있는 선장이어야 한다 등의 몇몇 조건을 내세웠다.
사실 손 선장은 팬스타엔터프라이즈 김현겸 사장과는 가야고등학교 선후배 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선장의 입지가 중요한 훼리선 운항을 두고 김사장은 믿고 맡길 수 있는 선배를 찾았는지 모른다. 또한 그 동안 복합운송업체로서 국내에서 자리매김을 하던 팬스타라인이 외항운송으로 눈을 돌릴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창명해운 이경재 사장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창명해운은 이번 오사카 훼리 사업 총 지분의 30%에 투자하였다.
이번 오사카 항로를 다시 열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김사장은 검수·검정(CIQ, Custom Clearance and Quarantine)을 들었다. 통관 절차 등을 오사카항에서도 시모노세키, 하카다항에서 만큼 신속하게 해 줄 수 있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건이었던 것.
배가 아침 10시에 입항하면 입항에 관련된 모든 서류 절차가 끝남과 동시에 검역과 통관이 동시에 진행되어 모든 절차가 막힘없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팬스타의 바램이다.
이러한 팬스타측의 입장에 대해 오사카 세관장은 (일본 중앙 정부 입장에서) ‘이번 카훼리 취항으로 오사카 항이 새로이 활성화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면서 ‘적정 물량만 확보된다면 팬스타측의 요구들은 다 들어줄 수 있다는 회신을 보내왔다”고 한다. 사실 팬스타 라인이 믿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번 오사카 루트가 일본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전초기지로서 오사카를 거쳐 나고야, 요코하마, 동경으로 연결되는 것.
이외에도, 일본에 비해 카훼리 사업이 크게 뒤떨어진 우리나라로서 당장 부산항 여객터미널 개발, 보수 문제뿐 아니라 변변한 여객 부두 하나 없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인 것으로 김사장은 지적하였다.

밤 9시 15분. 시모노세키 관문 통과를 위한 일본 도선사를 태우기 위해 훼리 운항 속도가 5~6노트로 낮춰졌다.
인터뷰 중 들리는 엔진 진동 소리에 창명해운 이 사장은 “엔진 속도가 어느 정도 임계 수준에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엔진이 진동하면서 소음이 발생하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부산한 홀을 빠져 나와 다시 갑판으로 올라갔다. 배 좌우로 색색의 불빛을 밝히고 있는 도시, 시모노세키가 거기 있었다. 제법 높은 고층 건물들에 의한 스카이라인, 공장의 긴 굴뚝, 부두에 바짝 지어진 야트막한 건물들이 지나갔다. 줄에 전구를 달았는지 길게 늘어져 있는 불빛도 보였다. 한마디로 시모노세키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바다 한 가운데로 비쭉 튀어나온 등대 위로는 ‘채널을 16(Keep 16)에 맞추라’는 글자가 한 자씩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바람이 한시도 쉴새 없이 몰아치는 갑판 위에서 한참 넋을 놓고 바라 보다가 이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리라 생각하고 셔터를 눌렀다. (나중에 필름을 인화했더니 이때 찍은 야경은 하나도 나오지 않아 결국 마음속에만 남아 있게 되었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던 시모노세키 야경도 질리고 불어 제끼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홀에서는 아직도 가무(歌舞)를 즐기시는 할머니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적막한 객실 복도를 뚫고 올라왔다.
세토나이카이 해상국립공원을 돌아봐야 비로서 일본인이라 말할 수 있다.”
팬스타 라인에서 건네준 오사카 브로셔에 나와 있는 문구이다. 거대한 철제 다리 그림과 함께. 그러나 그 철교를 직접 본 것은 또렷한 맨 정신으로가 아닌 잠결 비몽사몽간에였다. 무엇엔지 모르지만 저절로 눈이 떠져 머리맡 시계를 보니 바늘은 어느덧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내가 어디 있는지 가물가물했다. 좀 있어서야 어제 부산 항에서 배를타고 훼리여행을 떠난 것을 기억해 냈다. 우리가 잠들었던 시간에도 배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뿌연 선창 밖으로 회색 빛 거대한 철제 다리 장관이 펼쳐져 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다시 비비며 자세히 밖을 내다 보았다. 바다 안개 속에 몸을 일부 감춘 철제 다리는 무척이나 길고 거대해 보였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기나긴 일본 섬들 양 쪽을 이어주는 다리이니 직접 재어 보지 않더라도 그 길이가 상당할 것이라는 추측은 얼추 나온다.
그 다리 세토오오하시(세토대교)는 혼슈와 시코쿠를 잇는 꿈의 가교로 불리며 길이가 장장 9.44Km나 된다.
또한 이 세토대교를 품고 있는 세토나이카이는 1934년 일본 제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세토 내해"에 면한 690 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과 조용한 바다에 떠 있는 600개 이상의 수많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 세토나이카이는 ‘일본의 에게해’라고 일컬어지며 혼슈, 시코쿠, 규슈에 둘러싸여 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온난한 기후를 가진 내해이다.

다리를 완전히 지나자 다시 안개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보이는 것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뿌연 시계속에 어렴풋한 바다와 산의 모습뿐.
지루한 장면이 이어지면서 다시 침대로 달려갔다. 그저 이렇게 날이 꾸물꾸물한 날에는 침대 속에서 어기적거려 보는 것도 제 맛이다. 한참을 꾸물거린 후에야 침대를 빠져 나와 하선 준비를 하고 갑판으로 다시 나갔다. 한가로운 바다 위에는 부지런한 어부들이 벌써부터 통통배를 끌고 조업에 한참이다.
아직 9시도 채 되지 않은, 도시에서는 업무가 시작되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바다 위에는 ‘일찍 일어난 어부가 고기를 많이 낚는다’ 라는 설이라도 있는지 고깃배가 여기 저기서 통통거리고 있었다. 발끝까지 오는 녹색 앞치마를 두른 한 어부는 밤새 던져 놓았던 그물을 감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수확이 별로 신통치 않은 모습이다. 그물은 그냥 감기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아예 짐을 꾸려 객실을 나왔다. 도선사들이 올라 타면서 원래 일정에서 40여 분 정도 늦어졌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어제의 기상 악조건 속에서도 항해 시간을 맞추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늦어진 모양이다.
9시 15분 다시 육지가 나타나면서 고베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아카시대교를 만났다. 아침에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세토대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카시대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2Km) 고베와 아와지(Awaji)섬을 연결한다고. 아카시대교를 지나면서부터 조업하는 어선들이나 상선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오전 10시 30분. 머리 위에서 프로펠러의 굉음이 들렸다. 외항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상선과 예인선들을 슬슬 지나치는가 했더니 멀리서 아스라히 건물, 다리가 함께 어우러진 오사카항이 보였다.
처음에는 한 대의 헬기가 맴돌더니 곧이어 둘, 셋, 넷 … 헬기수가 증가했다. 그와 더불어 헬기의 굉음도 커졌다.
일본 해상에서 펄럭이고 있는 선미의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헬기가 왜 저리도 윙윙거리는지 궁금해졌다.
갑판으로 나오신 노인대학의 한 일원인듯한 할머니 한 분은 노인대학 할머니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헬기라고 설명하셨다. 돔 모양의 해상박물관 앞을 지나는데 청항선에서 시원스레 물줄기가 하늘로 솟구친다.
그 모양이 또한 장관이다.
워낙 바닷물을 청소하는 기능의 배로 바닷물을 빨아들여 오염물질을 제거한 후, 깨끗한 물을 뱉어낸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환영하는 쇼를 베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사카항에 근접할수록 여기저기서 여러 모양의 다리가 눈에 띄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일본에는 808이란 숫자를 가진 도시가 3곳이 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곳이 오사카인데 오사카에 있는 다리의 수가 808개나 된다고.
상징적인 숫자인지 아니면 실제로 808개인지 헤아려보지는 못했지만 어찌되었든 그만큼 오사카는 수많은 다리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2곳은 도쿄와 교토로, 도쿄에는 808개의 마을이, 교토에는 808개의 사당이 있다고 했다.

11시 10분 일본여객터미널 KF1에 접안 성공. 워낙 오사카 항만청으로부터 배정 받은 것은 KF2이지만 이날은 KF1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도선사와 함께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예인선의 활약이었다.
팬스타드림을 예인하기 위해 ‘Kanzaki Maru’라고 하는 예인선이 계속 따라 오기는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예인 작업은 하지 않고 그저 배 옆에서 멀뚱거리며 지키고 서 있더니 갑판에 나온 선원은 우리들의 사진을 찍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예인 작업은 할 생각이 없나 보다. 옆을 보니 컨테이너를 실은 K-Line 배가 입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상선 뒤에 조그마한 예인선이 달라붙어 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인선의 활약은 결국 남의 배를 보면서 만족해야 했다.
배에서 밧줄이 부두로 던져지고 일본 부두 직원들이 밧줄을 고박에 매었다. 유리로 외관을 장식한 오사카 국제터미널 부두에는 벌써부터 많은 인파가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탠드 위에 고정되어 있는 방송 카메라를 우리를 향해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과 카메라를 메고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속에서 부산/오사카 훼리의 첫 항해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배의 문이 열리고 잠시 후 여객터미널로 이어지는 브릿지가 왔다. 그러나 배가 약간 뒤로 접안이 되어서 브릿지를 직각으로 배 안으로 집어 넣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히 왔다 갔다 한 직원들 덕분에 접안 후 근 1시간 여 만에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 크기가 크다 못해 썰렁하게 느껴지는 세관에서는 파란색 제복을 입은 세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은 앳돼 보이는 세관원이 음식 메뉴판처럼 생긴 판을 펼치더니 ‘가지고 있는 담배가 있습니까’ 라는 한국어로 쓰여진 문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니오’ 라는 답변만 짤막하게 하고 무사히 세관을 통과하였다. 터미널로 통하는 문이 열리자 당황스럽게도 수많은 방송 기자들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긴장 상태에서 대기하고 있다. 비록 나를 찍기 위해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국적선의 첫 훼리에 대해 일본 언론이 보인 이러한 관심은 한국에서 온 땅딸막한 여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23일 오후 4시 한국을 출발한 오사카 첫 훼리는 25일 11시 30분, 19시간 30분만에 일본인들의 열화와 같은 관심 속에 오사카 항에 무사히 들어왔다.
<끝>

취재·글 백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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