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기선 업계를 보면 ‘돌고 도는 세상’이란 유행가 가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2000년대 초중반, 수출경기가 활성화되면서 해운업계는 최고의 황금기를 보냈다. 화주들은 선복을 잡기 위해서 일일이 선사 영업사원을 찾아다니며 선적예약을 부탁했고 선사들은 ‘화물 자르기’에 고민했다. 그야말로 배를 가진 곳이 ‘갑’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해운경기는 급전직하했고 선사들을 찾아다니던 화주는 사라졌다. 10년 불황의 시작이었다.
상위권 선사들이 공급 확대를 배경으로 하는 치킨게임을 주도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해운업계는 초대형선 도입, 화물 유치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고 정기선 시장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모해갔다. 수십 년 간 사업을 일궈오던 선사들이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하나둘씩 인수합병(M&A) 절차를 밟았다.
반면 범국가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덩치를 키운 기업들은 부실한 경쟁기업 사냥에 열을 올렸다. 1~2년 새 급속도로 진행된 M&A는 시장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합종연횡 태풍으로 선사 수가 줄어들면서 정기선 업계는 과점 체제로 급격히 전환됐다. 정기선 시장은 몇 개 선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놓였다. 현재 세계 20위권 선사 중 상위 7개 선사의 선복량은 신조 발주량을 포함해 130만TEU를 넘어선다. 반면 8위선사는 7위선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선대를 보유했을 뿐이다. 15위에 랭크된 우리나라 현대상선은 4분의 1 수준인 34만TEU에 불과하다.
경쟁력을 상실한 선사들의 퇴출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공급 증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속을 들여다보면 늘어나는 선복은 공룡들의 몫이다.
7월 컨테이너선 공급 규모는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프랑스 해운조사기관인 알파라이너에 따르면 전 세계 컨테이너선대는 5993척 2103만TEU를 기록했다. 신조 발주가 감소하고 선박해체도 기록적인 수준에 이르렀지만 선복량은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며 2000만TEU를 넘어섰다.
세계 컨테이너선대가 늘어나는 만큼 빈익빈부익부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실제로 7대 선사의 점유율은 무려 73%에 이른다. 한진해운이 세계 7위 선사였던 작년 이맘때의 59%에 비해 무려 14%포인트나 상승했다.
몸집을 키운 선사들의 독과점화는 결국 화주와의 힘겨루기에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해운 불황 이후 전문가들은 무조건 저렴한 비용을 앞세워 선사를 줄 세우기 하는 화주 행태를 비판했다. ‘묻지마’식 단가 후려치기가 결국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란 경고였다.
안타깝게도 화주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한진해운과 같은 주요 선사의 재무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왔을 때도 더 싼 운임을 찾기에 바빴다. 지난해 유럽항로 운임이 아시아역내항로보다 낮은 300달러 아래로 떨어진 건 이 같은 흐름을 잘 보여주는 예다.
올해 들어 선사들은 수익성 회복에 방점을 찍고 있다. 얼라이언스를 새롭게 출범하면서 기간항로에서 화주들의 선택지를 가차 없이 줄여버렸다. 그 결과 유럽항로 운임은 1000달러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에는 사이버테러에 선사들도 노출 되면서 화주들은 또 다른 문제를 걱정해야하는 처지다.
선사와 화주 간 힘겨루기에서 한쪽만 이득을 보는 일방적인 상황은 오래가지 않는다. 과점화 된 정기선 시장이 선사들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하지 않을 거란 얘기기도 하다. 선화주 상생은 먼 데 있지 않다. 물류흐름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자세, 이것이야말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장에서 선사와 화주가 같이 살아나갈 수 있는 바탕이 아닐까.
< 정지혜 기자 jhjung@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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