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4 18:06

칼럼/한·중 외교수사(修辭)와 시(詩) 그리고 성어(成語)

수필가 白岩 / 이경순

중국 정치인들은 시(詩)나 성어(成語)를 쓰기 좋아하는 것 같다.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강택민, 후진타오 등 중국 근현대 정치지도자들이 주로 인용했던 권토중래(捲土重來), 우공이산(愚公移山), 유비무환(有備無患), 고장난명(孤掌難鳴), 흑묘백묘(黑猫白猫), 화평굴기 등 백 마디를 뛰어넘는 날카로움과 깊이를 가진 성어이다.

시진핑 주석도 예외가 아니나 시(詩)를 즐겨 인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나 성어를 인용하는 것이 때로는 풀어 이야기하는 것보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6월 한·중 정상회담이나 10월 APEC 정상회의 때 박근혜 대통령은 여러 가지 시와 성어를 인용해 양국 간에 큰 화제를 낳았다.

박 대통령이 시의적절한 말을 준비했다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한·중 관계 발전에 포인트를 맞췄다. 우선 우리 측에선 6월 박 대통령의 방중을 ‘심신지려(心信之旅)’라는 ‘마음과 믿음을 쌓아가는 여정’이라는 뜻의 새로운 조어(造語)다.

방중 첫날 박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겨냥해 공자의 말을 동원했다. “처음엔 사람의 말을 듣고 행실을 믿었으나 이젠 말을 듣고도 행실을 살핀다(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북한의 진정성 있는 행동을 촉구한 것이다.

둘째 날 박 대통령은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서의 연설 도중 중국에서 ‘장사를 하려면 먼저 친구가 되라(先做朋友 後做生意)’를 중국어로 말해 박수를 받았고 셋째 날 칭화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선 관자의 말을 중국어로 인용해 주목을 끌었다. 바로 “한 해의 계획으론 곡식을 심는 것보다 나은 게 없고(一年之計 莫如樹谷) 십년의 계획으론 나무를 심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十年之計 莫如樹木). 백년의 계획으론 사람을 심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百年之計 莫如樹人)”는 대목.

이에 반해 시진핑 주석은 한·중 양국의 돈독함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에 나오는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를 인용했다. 또 시진핑은 한·중 관계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의 시구가 담긴 서예작품을 박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작품은 당(唐)대의 시인 왕지환(王之渙)이 쓴 ‘관작루에 올라(登觀雀樓)’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황하는 바다로 흐른다. 천리를 내다보려는 자는 한 계단 더 오르라(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지난 10월 APEC 정상회의 때 우리 국민들은 朴대통령이 나란히 앉은 아베와는 눈길 한번 안 마주치면서 시진핑엔 ‘한 계단 더 오르라(更上一層樓)’는 시(詩)귀를 인용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언론 매체를 통해 접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북핵 보유를 반대하며 북한의 추가적 핵실험을 결연히 반대한다”는 시 주석의 분명한 발언을 끌어낸 것은 대북문제에 있어 한·중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통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재차 확인했다는 평가다.

한·중 양국의 발전이 한 단계 더 성숙되기를 기원하는 한국인의 바람이다. 두 나라가 영원히 이웃해 살 수밖에 없는 운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등관작루(登觀雀樓)’가 ‘미국의 거대한 국력(白日)은 중국(山)에 가려져 점차 쇠퇴하며/이제 중국(황하)은 21세기(海)를 선도하는 것을/수천여 년의 역사를 궁리해 보면/한 단계 높아진 안목으로 이 흐름을 알게 되리라’로 읽히는 것을 어찌하랴.

한·중 정상회담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신라 말의 대석학 최치원(崔致遠:857~?)의 시 ‘범해(泛海.바다에 배를 띄우다)’망망대해에 배를 띄우니 속세에서의 욕망이 덧없이 느껴진다는 내용은 송(宋)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가 ‘적벽부(赤壁賦)’에서 인간의 존재를 ‘창해일속(滄海一粟)에 비유한 것과 비슷한 정취가 엿보인다. 이런 시정(詩情)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소재가 봉래산 일 것이다. 봉래산은 전설상의 산으로 삼신산(三神山: 신선이 산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의 세 전설적인 산)가운데 하나다. 마지막 부분에서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는 듯, 나도 신선을 찾아보리라”고 한 것을 보면, 최치원은 항해 도중 삼신산을 생각하며 가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국가주석이 ‘괘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이라는 앞부분을 인용해 유명해진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다음에 나오는 ‘승사사한사 채약억진동(乘?思漢使 採藥憶秦童·뗏목 탔던 한(漢)나라 사신이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아이도 생각나네)’이라는 구절이다.

중화사상이 뿌리 깊이 박힌 역사에 밝은 중국 지도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최치원을 언급한 것을 ‘한·중의 오랜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만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다.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이 다시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도 직시하고 훌륭한 조상에게서 배우라는 권유로 들리는 것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21세기에 최치원에게서 배우라‘는 중국의 지도자의 범해 시 인용에 대한 호응은 이미 한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좌파는 중국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중화질서’에 편입되자고 주장한다. 중국의 커지는 경제적 위력을 실감하는 우파는 ‘친중(親中)’ ‘지중(知中)’을 역설하며 중국어 배우기에 열심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중국의 동의 없이 어렵고 미국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든다며 통일 한국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학자도 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수천 년간 중국을 어떻게 상대할지가 가장 큰 대외적 고민이었다. 겨우 한 세기 남짓 잊고 지냈던 중국 문제가 다시 우리 민족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음을 실감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복잡해진 국제정세는 우리의 선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중국은 지금 과연 당나라 그때처럼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는가? 실리적 측면뿐 아니라 긴 역사적 관점에서도 대중(對中)관계를 사활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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