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해 보였던 입증의 벽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2025년 1월 9일에 선고된 대법원 2024두45979 판결이 직업성 질병의 인과관계 판단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선원법상 직무상 질병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직무수행성과 직무기인성이다. 직무수행성은 선원에게 발병한 질병이 사업주의 지배·관리하에서 근로업무 또는 이에 수반되는 통상적인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해야 함을 의미하며, 직무기인성은 직무와 질병의 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장하는 측(주로 선원)이 증명하여야 한다.
따라서 암과 같이 잠복기와 발병원인이 복잡한 질환이 직무관련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암 자체 확인에서부터 발암물질 노출 여부, 해당 물질과 질병 간의 연관성, 특이적 소견, 그리고 비직업성 원인 가능성을 차례로 검토하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결과 직무관련성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선원의 직무상 질병에 대한 판단은 아니고 20년간 배전전기원으로 근무한 근로자의 갑상선암 사례에 대한 판단이었다. 항소심은 근로자에게 노출된 전자기장이 갑상선암의 발병원인이라는 의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며 업무상 재해를 부정하였으나, 대법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을 고려해 현 수준의 과학으로 인과관계를 명확히 증명하기 어렵다 해도, 의심요소와 질병 간의 상당인과관계가 합리적 추론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법리를 설시하였다.
특히, 대법원은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누적적 작용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장기간 높은 수준의 극저주파 전자기장에 노출된 것이 원고의 신체 상태에 악영향을 주고, 이것이 원고의 체질이나 기초질병 등 다른 요인과 결합하여 이 사건 상병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판시한 것이다. 선박으로 말하면, 선원들이 직면할 수 있는 여러 유해환경이 복합적으로 선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법원, 통계적 한계 인정
스트레스에 대한 접근도 달라졌다. 대법원은 과도한 스트레스는 그 자체로 질병을 촉발하거나 신체의 면역력을 저하시켜 질병의 악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질병의 발병이나 진행을 촉진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통계적 한계를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수가 적거나, 기술의 발달 및 사업구조의 변화로 기존 작업환경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경우에는 연구 표본도 부족하고, 연구의 필요성도 적어지기 때문에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당시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유해성이 인정되지 않던 요소의 위험성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뒤늦게 밝혀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법이 따뜻한 시선으로 근로자와 선원을 바라봐 주기 시작
필자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앞으로 선원의 재해보상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한다. 이제는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완벽한 증명보다는 해당 유해물질이 질병의 발병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수준의 연구 결과들도 인과관계 판단에 있어서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직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사례들도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번 대법원 판결은 선원의 직무상 질병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은 아니지만, 선원의 재해보상 문제에서도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불확실성이 곧바로 법적 면책을 의미하지 않으며, 상당인과관계(직무기인성) 인정의 문턱을 낮출 수 있는 기준도 제시되었다. 법이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근로자와 선원을 바라봐 주기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인 사안마다 세심한 법적인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출발선은 보다 공정해졌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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