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09:05

판례/ “러시아에서 날아온 판결문”

김현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해양수산부 고문변호사)
<10.18자에 이어>

◆평석
1. 시작하며
이번 호에서는 러시아 법원에서 확정된 판결에 기해 한국에서의 집행을 허가한 하급심 판결에 관해 살펴본다. 

2. 사실관계
가. 원고는 러시아 법령에 따라 설립된 유한책임회사로서 각종 기계류 및 그 부속품의 도매업 등의 사업을 하고 있고, 피고는 대한민국 법에 따라 설립된 주식회사로서 각종 산업기계의 제조, 가공, 판매 및 수출입 등의 사업을 하는 자이다.
나. 원고는 2016년 2월24일 피고를 상대로 해 러시아 모스크바 상사법원에 ‘2014년 9월경 원고와 피고 사이에 체결된 리버스 서큘레이션 드릴 장치 공급계약과 관련해 매수인인 원고가 매도인인 피고에게 선지급금으로 지급한 미화 324,674달러를 반환하라’는 내용의 소를 제기했다. 
다. 피고는 현지 소송대리인을 선임해 위 소송에 응소하는 한편, 원고를 상대로 원고가 이 사건 계약과 관련해 지급했어야 하는 돈의 이자 상당액인 미화 83,291.21달러를 부당이득으로 취득했다고 주장하며 그 반환을 구하는 반소를 제기했다. 
라. 러시아 제9항소 상사법원은 2017년 4월4일 원고의 본소청구를 인용하고 피고의 반소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했고, 2018년 7월10일 직권으로 위 미화를 원고가 소 제기한 당시의 환율로 계산한 러시아화 25,668,726.44루블로 지급하라는 내용으로 경정하는 결정을 했으며, 위 판결과 결정은 모두 확정됐다(이하 '이 사건 확정판결'이라고 한다).
마. 원고는 이 사건 확정판결에 대한 승인이 민사소송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외국재판의 승인요건에 반하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 확정판결의 강제집행을 허가하는 내용의 집행판결을 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3. 법원의 판단
가. 러시아 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 인정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1항 제2호)
원고와 피고는 이 사건 계약에 관한 분쟁을 러시아 모스크바 상사법원에서 해결하도록 약정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러시아 모스크바 상사법원 및 그 상급법원의 이 사건 계약에 관한 분쟁에 대한 국제재판관할권이 인정된다.

나. 피고에 대한 적법한 송달 및 응소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1항 제2호)
피고는 러시아 법령에 따라 적법하게 송달을 받고, 현지 소송대리인을 선임해 원고를 상대로 반소를 제기하며, 제1심판결에 대해 항소와 상고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 사건 확정판결의 소송에 응했다.

다. 외국재판 승인의 대한민국의 공서양속 합치 여부 판단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1항 제3호)
이 사건 확정판결은 단순 금전지급 의무의 이행을 명한 판결로서 이 사건 확정판결을 승인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난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은 없다.
러시아 법령에 의해 러시아 법원이 판결을 선고할 때에는 외국 통화로 된 돈을 러시아 통화인 루블로 계산해야 하고, 이 사건의 경우 원고가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일자의 환율로 미화에서 러시아화로 계산해야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바, 러시아 법령에 따라 적법하게 선고된 이 사건 확정판결이 대한민국 법령에 따랐을 때의 결론과 일부 다르다고 해 그것이 우리나라의 국내법 질서가 보호하려는 기본적인 도덕적 신념과 사회질서에 위배돼 절차적인 공서양속에 반한다고 볼 수는 없다. 나아가 외국 통화로 선고할 것인지, 자국 통화로 선고할 것인지의 문제와 환율 적용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지의 문제는 각국이 정책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로서 한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적 신념이나 사회질서와 관련된다고 보기 어렵다.

라. 외국법원 소속 국가의 상호보증 요건 구비 여부 판단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1항 제4호)
러시아 상사소송법은 외국판결의 승인요건과 관련해 제244조 제1항에서 '① 외국법령에 따라 해당 외국판결에 대해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 ② 패소한 당사자가 적시에 적절한 송달을 받지 못했거나 기타 사유로 변론에 참여하지 못한 경우, ③ 러시아가 체결한 조약 또는 러시아 연방법에 따라 해당 사건에 대한 전속적 관할권이 러시아 법원에 있는 경우, ④ 러시아 법원이 동일한 당사자 간의 동일한 소송물에 대해 동일한 근거로 선고한 유효한 판결이 이미 존재하는 경우, ⑤ 동일한 당사자 간의 동일한 소송물에 대해 동일한 근거로 해당 외국판결의 절차 개시 전 러시아 법원에 해당 분쟁에 대한 소송절차가 개시돼 계속 중이거나 러시아 법원에 최초로 소가 제기된 경우, ⑥ 해당 외국판결의 집행 가능기간이 도과했고, 상사법원이 기간 연장을 허가하지 않은 경우, ⑦ 해당 외국판결의 집행이 러시아연방의 공공질서에 어긋나는 경우에 외국판결의 승인 및 집행을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246조 제2항에서 '외국법원 판결은 그 효력 발생일로부터 3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기간 내에 강제집행이 개시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243조 제5, 6항에서 '외국법원이 외국법원 판결의 취소 또는 집행정지를 검토 중인 경우 러시아 상사법원은 집행문 발급을 연기하고 담보제공 의무를 외국판결 승인 신청자에게 부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살피건대, 러시아 상사소송법 제244조 제1항에서 규정한 요건 중 ①, ②, ③, ⑦번 요건의 경우 우리나라 민사소송법, 민사집행법 및 판례가 정하고 있는 외국판결의 승인요건과 실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고, ④, ⑤번 요건의 경우 기판력과 중복제소금지원칙에 따른 것으로서 이를 두고 러시아 법원의 외국판결 승인요건이 우리나라의 승인 요건보다 훨씬 어렵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⑥번 요건과 러시아 상사소송법 제246조 제2항의 경우 외국판결의 승인에만 적용되는 제한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선고되는 일반적인 재판에도 적용이 되는 요건으로서 위 요건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러시아 법원의 외국판결 승인요건이 우리나라의 승인요건보다 훨씬 어렵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나아가 러시아 상사소송법 제243조 제5, 6항의 경우 외국법원이 외국법원 판결의 취소 등을 검토 중인 경우에 러시아 상사법원이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조치로 보인다. 그렇다면 러시아 상사소송법이 정한 외국판결 승인요건은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이 정한 것보다 전체로서 과중하지 아니하고 중요한 점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정도라 할 것이어서 러시아 법원에서 우리나라의 동종판결을 승인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아가 대한민국 회사가 러시아 회사를 상대로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지연손해금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해 승소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에서, 러시아 캄차카 지역 상사법원은 2018년 7월17일 위 판결을 승인해 러시아 내에서 집행을 허가하는 판결을 선고하고 이에 대한 항소가 기각된 바 있으므로 러시아에서 우리나라의 동종판결을 승인할 것이라고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4. 결론
국제 소송에 있어 판결의 확정은 끝이 아니라 집행을 하기 위한 국가에서 재판의 승인을 받아야 진정한 종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법원은 외국재판의 승인 및 집행의 근거로 이중의 절차 방지를 통한 당사자의 원활한 권리 실현을 들고 있다.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1항 제4호는 외국재판의 승인요건으로서 상호보증을 요구하고 있는데, 상호보증 요건을 강하게 요구할 경우 외국 재판이 내용상 우리나라 법률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승인을 거절하게 되므로 위와 같은 외국재판의 승인을 허용하는 목적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우리나라와 외국 사이에 같은 종류의 판결의 승인요건이 현저히 균형을 상실하지 아니하고 외국에서 정한 요건이 우리나라에서 정한 그것보다 전체로서 과중하지 아니하며 중요한 점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정도라면 상호보증의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해 상호보증의 요건을 완화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상호보증은 외국의 법령, 판례 및 관례 등에 의해 승인요건을 비교해 인정되면 충분하고 반드시 당사국과의 조약이 체결돼 있을 필요는 없으며, 당해 외국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의 같은 종류의 판결을 승인한 사례가 없더라도 실제로 승인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이면 충분하다고 본다(대법원 2016년 1월28일 선고 2015다207747 판결 참조).
본건에서는 러시아 상사소송법이 정한 외국판결의 승인요건이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이 정한 것보다 과중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고, 최근 러시아가 조약을 체결하지 아니한 우리나라의 판결을 승인한 사례 등을 들어 우리나라의 동종판결을 승인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나라 법원은 본건에서 상호 또는 다자간 조약을 체결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종류의 판결을 승인한 사례가 없는 경우에도 해당 국가의 승인 요건을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민사소송법과 비교해 상호보증요건의 충족여부를 판단한 것이다. 
우리나라 법원은 이스라엘의 법인이 한국 회사를 상대로 이스라엘에서 물품대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의 승소판결을 받아 한국에서 집행판결을 구한 사건에서도 ‘이스라엘국 외국판결의 승인 및 집행 요건은 대한민국의 민사집행법 제27조 민사소송법 제217조에 규정된 요건보다 전체적으로 과중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대체로 동일한 내용’이라고 판단하며 집행을 허가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2020년 10월13일 선고 2019가단109454 집행판결 참조). 과거에 외국에서 승소판결을 받고도 민사소송법 제217조의 요건 중 일부를 불충족한다는 이유로 외국재판의 승인을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과 달리 근래 법원은 본건과 같이 외국재판의 승인을 널리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국제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용이해진 시대에 이와 같은 판결은 합당하다. 다만, 외국에서 송사에 휘말린 우리나라 회사로서는 이러한 추세를 고려해 외국재판에 있어서 방어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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