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2 09:06

기고/ 선박의 기적신호(汽笛信號)

변호사가 된 마도로스의 세상이야기(13)
성우린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2항사, 상대방 선박에 단음 5회의 기적신호를 보내게.”

필자가 당시 승선한 선박은 흑해로 들어가기 위해 터키 서부 해안과 그리스의 섬들 사이에 위치한 에개해(Aegean Sea)의 한 수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필자는 선교에서 육안으로 우리 선박 쪽으로 다가오는 상대 선박을 확인하고는, 레이더와 AIS(자동선박식별장치, 선명 등 선박의 명세가 표시됨)를 통해 상대 선박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 선박과 우리 선박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피항선인 상대 선박이 속도와 방위를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본선에 설치된 VHF(초단파 무선통신 장비)를 이용하여 이전에 확인했던 선명으로 상대 선박을 호출했다. 우리 선박이 기대했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상대방의 선박은 말 그대로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선장님이 당시 2항사였던 필자에게 ‘단음 5회’의 기적신호(汽笛信號)를 지시하였다. 1972년 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 협약(COLREG, 1972)에서 규정하고 있는 ‘단음 5회’의 기적신호는 서로 상대의 시계 안에 있는 선박이 접근하고 있을 경우에 하나의 선박이 다른 선박의 의도 또는 동작을 이해할 수 없거나 다른 선박이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충분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아니한 경우에 보내는 신호이다.

상대방 선박이 우리가 발한 기적신호를 들었는지 그제야 VHF를 통해 우리 선박을 호출하여 “Red to Red(양 선박이 좌현 대 좌현으로 통과하자는 의사표시, 선박 좌현의 현등 색깔은 빨간색임)”를 요청하였고, 우리 선박은 이에 동의하여 침로를 우현으로 변침한 후 양 선박이 안전하게 통항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선박의 기적신호를 어떻게 발하느냐에 따라 항해사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은 쉽게 알지 못하는 항해사들만의 상식 중 하나이다. 국제협약인 COLREG에서 공통된 기적신호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항해사들이 기적신호만으로도 상대 선박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선박의 기적신호는 안개와 강우 등으로 선박의 시계가 제한된 경우나 좁은 수로 등에서 상대 선박을 추월하려는 경우에 매우 중요하게 활용된다. 시계가 제한된 수역이나 그 부근에 있는 모든 선박은 밤낮에 관계없이 항행 중인 동력선은 대수속력이 있는 경우에는 2분을 넘지 아니하는 간격으로 장음을 1회 울려야 하며, 항행 중인 동력선은 정지하여 대수속력이 없는 경우에는 장음 사이의 간격을 2초 정도로 연속하여 장음을 2회 울리되, 2분을 넘지 아니하는 간격으로 울려야 한다(해사안전법 제93조 제1항 제1호, 제2호).

그리고 선박이 좁은 수로 등에서 서로 상대의 시계 안에 있는 경우 추월선이 좁은 수로 등에서 추월당하는 선박이 추월선을 안전하게 통과시키기 위한 동작을 취하지 아니하면 추월할 수 없는 경우에 다른 선박의 우현 쪽으로 추월하려는 경우에는 장음 2회와 단음 1회의 순서로 의사를 표시하여야 하고, 다른 선박의 좌현 쪽으로 추월하려는 경우에는 장음 2회와 단음 2회의 순서로 의사를 표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추월당하는 선박이 다른 선박의 추월에 동의할 경우에는 장음 1회, 단음 1회의 순서로 2회에 걸쳐 동의의사를 표시하여야 한다(해사안전법 제92조 제4항).

항해사가 위와 같은 기적신호를 발할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 선박 충돌 등이 발생하는 경우 직접적으로 사법적인 법률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선박충돌의 과실비율 설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국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액의 산정에서 불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성우린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전 팬오션에서 상선의 항해사로 근무하며 벌크선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 다양한 선종에서 승선경험을 쌓았다. 하선한 이후 대한민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로펌에서 다양한 해운·조선·물류기업의 송무와 법률자문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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