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들, 시황 ‘오리무중’우려…하주들도 혼란 일 듯
●●● 유럽항로는 한차례 큰 격랑을 예고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해운산업에 대한 독점금지법을 강화하면서 지난 130년간 해운산업을 지탱해왔던 해운동맹(shipping conference)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해운동맹은 특정항로를 취항하는 정기선사들이 지나친 경쟁에 의한 시황 하락을 막고 서로간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카르텔이다. 지난 1875년 결성된 영국-캘커타 동맹이 효시로 알려지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 정기항로상에 약 360개의 동맹이 선사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130년 역사 FEFC 역사의 뒤안길로
해운산업에 대한 경쟁법(독점금지법) 적용 면제의 근거가 돼 왔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 규칙 4056/86이 제정된지 12년만에 폐지된다.
EC는 지난 2003년 3월27일 해운산업 독점금지 면제의 부당성을 줄기차게 지적해온 유럽하주협의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기선 해운동맹의 공동가격설정 및 선복량 규제 행위 금지 여부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결국 2006년 9월 25일 해운동맹에 대해 경쟁법을 적용키로 하는데 합의하고 EU 이사회로부터 승인받았다. EC는 올해 10월까지 법 적용 유예기간을 두는 한편 경쟁법 적용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지난해 9월 ‘경쟁법 적용을 위한 가이드라인’ 초안을 마련했다.
유럽정기선사협의회(ELAA)는 이에 대해 해운동맹을 폐지하는 대신 운임 등 시장 정보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대안체제를 제시하기도 했으나 하주단체의 반대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올해 7월1일 EC는 경쟁법 발효 석달 앞두고 1년전 마련했던 가이드라인 확정안을 발표했다. 선사들이 기대했던 정보교환을 위한 대안체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다만 발효기간만 10월18일로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해운기업은 해운동맹, 컨소시엄, 전략적 제휴, 얼라이언스 등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운임 또는 할증료에 대한 협의나 가이드라인 설정 등의 담합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아울러 선복 조정 및 감축에 대한 협의도 경쟁제한 행위로 간주돼 금지된다. 적용대상은 정기선 뿐 아니라 부정기선 및 연안해운까지 포괄적으로 포함됐다.
이에 따라 1879년 처음 설립돼 올해로 129년째를 맞은 구주운임동맹(FEFC)도 18일 이후 17곳의 개별 선사 체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에 앞서 대서양 항로동맹협정(TACA)은 지난 7월초 마지막 회의를 끝으로 작별을 고했다.
해운기업들은 ELAA와 같이 운임 및 할증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만 시장 정보의 수집이나 분석, 교환, 운항서비스와 관련된 협력 등 공동행위를 할 수 있다. 컨소시엄도 시장점유율 35% 미만인 경우에만 허용된다.
물동량 총량 데이터는 4주 지난 자료에 한해, 개별 선사 물동량 및 요율은 1년이 지난 자료에 한정해 공유가 허용된다. 결국 현재 시점에서 선사들의 운임 담합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정보 공유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고 할 수 있다. 선사에게 가장 불리한 쪽으로 법이 시행되는 것이어서 향후 선사들의 운신의 폭은 상당히 제약될 전망이다.
법 위반하면 회사 문 닫을 판
만약 법을 위반할 경우 EU 지역 항로에 취항하는 해운 선사들은 전체 그룹 매출액의 10%란 엄청난 규모의 벌금을 물게 된다. 독립 회사의 매출액이 아닌 그 회사가 속한 그룹의 전체 매출액이 벌금으로 매겨지는 것이어서 선사들은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그룹 매출액이 7조7천억원과 5조9천억원에 달했던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유럽항로에서 경쟁법 위반으로 제소될 경우 각각 7700억원과 5900억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특히 세계 최대 정기선사인 머스크라인의 경우 법 위반으로 물게 되는 벌금은 자그마치 6조원(약 51억달러)에 이른다. 머스크라인이 속한 AP묄러-머스크 그룹의 지난해 매출액은 512억달러였다. 그야말로 한번 실수로 회사가 문을 닫기 일보직전까지 가야할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다.
무거운 벌금제도로 선사들은 위법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해운동맹 해체에서 나아가 각종 비공식 모임까지 모두 중단할 예정이다. 업계 사장단 골프모임에서 실무자들 친목모임까지 유럽항로와 관련된 모임들은 사실상 해체되거나 활동을 접었다.
외국계 A선사 한국법인 고위임원은 “앞으로 어떤 유럽 모임에도 참석치 말라는 지시가 본사에서 내려 왔다”며 “자주 나가던 각종 임원 모임도 모두 중단한 상태”라고 전했다.
경쟁법 적용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선사들도 자구책 마련에 들어갔다. 운임 적용을 위한 정보공유가 완전히 차단되는 만큼 대내적으로 자체적인 운임 산정 툴 개발에 부심하고 있다. 프랑스 선사 CMA CGM은 선사로선 처음으로 지난 8월부터 자체 유가할증료(BAF)을 도입해 홈페이지를 통해 공표하기 시작했으며 지난달 초 덴마크 머스크라인이 여기에 동참했다. 게다가 양대 국적선사인 현대상선과 한진해운도 각각 지난달 초와 말 이달부터 적용할 자체 BAF를 하주에 통보했다.
B선사 관계자는 “할증료는 선사별로 이미 산정방식을 준비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본운임은 ‘감’으로 할 수밖에 없다”며 “4월에 운임인상을, (전통적으로) 성수기인 7~8월에 성수기할증료(PSS)를 도입하는 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EC의 조치는 유럽선사들보다는 아시아선사들에게 영향이 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머스크라인이나 MSC, CMA CGM 등 유럽선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체적인 영업망과 운항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독립적으로 사업을 벌여온 반면 국적선사인 한진해운이나 현대상선을 비롯해 일본계인 NYK나 MOL, 케이라인, 중국계인 코스코·OOCL, 싱가포르 APL 등은 선사간 협업체제를 통한 영업형태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EC도 한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을 특히 요주의 지역으로 분류해놓고 있다. EC는 감독관을 불시에 이들 지역으로 보내 회사 내부자료 검사까지 불사하며 시장의 반독점행위를 심사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럽항로, 물동량 감소에 ‘설상가상’
선사들에겐 해운동맹의 해체로 유럽항로의 기본운임 안정화가 과제로 주어졌다.
선사들은 지난해 유럽항로가 사상초유의 시황상승을 보이자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미주 시장 투입 선박들을 대거 이 항로로 돌렸다. 또 최근 발주했던 초대형 신조선들을 유럽항로에 띄웠다. 머스크라인이 세계 최대 선박인 1만1천TEU급(실제 적재능력 1만4천TEU) 컨테이너선 8척을 모두 남중국-유럽 노선인 AE7에 배선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미국발 금융위기와 중국 베이징 올림픽의 여파로 물동량이 크게 감소하면서 심각한 선복과잉 시황이 빚어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지난해 20피트 컨테이너(TEU)당 4천달러대에 이르던 운임도 최근 들어 1500달러선까지 곤두박질쳤다. 반토막나다 못해 무려 3분의1 수준까지 급락한 것이다.
이같이 유럽항로 시황이 급랭하자 선사들은 선박 서비스를 한항차 건너뛰기(스킵)하거나 미주항로로 선박을 다시 재배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각각 지난 8월말과 지난달 초 유럽항로 서비스에서 1항차씩을 쉬었다. 최근 원양항로에서 6천TEU급 선박의 1항차를 건너뛸 경우 대략 1백만달러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선사들은 말한다.
때문에 중국발 물동량의 급감으로 유럽항로 시황이 크게 악화된 상황에서 운임동맹 해체가 항로 시황악화에 기름을 붓지는 않을지 선사들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C선사 관계자는 “올림픽을 기점으로 중국발 화물이 크게 줄면서 최근 항로 시황이 매우 침체돼 있다”며 “이런 와중에 시황 정보 자체가 막힐 경우 선사들은 안개 속을 헤매면서 사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우려섞인 말을 전했다. 유럽항로는 하주들에 의해 주도되는 하주중심시장(shipper’s market)으로 완전히 재편될 것이란 비관적인 분석이다.
한편 하주들은 이번 유럽항로에서의 경쟁법 강화 조치를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해운산업의 독점금지 강화가 확산될 것으로 보고 아시아도 이같은 흐름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이 지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하주단체 연합체인 세계하주포럼(GSF)은 최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EU의 해운동맹 철폐조치와 최근 미국의 독금법 강화추세를 지적하며 아시아 각국 정부도 선사간 경쟁촉진을 위한 해운개혁조치들을 도입할 것을 촉구했다.
실제로 미국에선 의회에 설치된 반독점현대화위원회가 해운동맹 폐지를 건의하는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독점금지 강화에 불을 당겼다. 또 인도는 선사들의 역내 운임동맹인 IPBC의 철폐를 추진중이며 호주도 포괄적인 해운동맹의 면제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거대선사에 의한 신독과점체제 지적도
하지만 업계 일각에선 이같은 일련의 해운시장 독점금지 강화가 결국엔 하주들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의 속성상 선사들도 이윤을 목적으로 기업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다.
예를 들어 시황이 강세일 경우 해운동맹 시절엔 각 동맹이 상한 기준을 제시했지만 앞으로는 이같은 기준이 없어지면 물동량이 폭주하는 선사들의 경우 운임을 천정부지로 인상할 수 있다. 또 약세 시황에선 떨어지는 운임에 대신해 선박을 빼거나 서비스를 줄여 채산성을 개선하려는 전략이 대세가 될 가능성도 크다.
게다가 당장 유럽항로의 경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각 선사별로 할증료가 쏟아지면서 하주들이 초창기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도 우려스럽다. 하주들은 운임총액 개념인 DDP(관세지급인도)나 DDU(관세미지급인도) 등의 무역조건으로 운송을 진행할 공산이 크다. 이럴 경우 시장 정보력이 떨어지는 중소하주들은 개별 선사들의 운임수준을 모두 파악할 수 없어 운임협상력에서 더욱 뒤쳐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해운산업에서의 지나친 독과점 규제 정책이 무분별한 경쟁을 불러와 다른 형태의 독과점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경쟁지향형 제도가 해운 시장을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되는 약육강식의 구조로 재편해 최근 몇 년간 진행돼 온 선사들의 인수·합병(M&A)에 다시 한번 불을 지필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머스크라인의 피앤오네들로이드 인수와 CMA CGM의 델마스 인수, 하파그로이드의 CP쉽스인수에 이어 최근 하파그로이드 인수에 눈독 들이고 있는 NOL까지 물고 물리는 M&A 속에서 대형선사 출현에 의한 시장재편의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결국 운임상승, 서비스질 하락, 초거대선사의 신독과점체제 출현 등 이래저래 하주들만 피곤해 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경희 기자>
0/250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