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운송 실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책임 제한이다. 선박 사고나 화물 손상 사고가 발생하면 선박소유자와 해상운송인은 원칙적으로 국제 협약이나 상법에 따라 일정 한도까지만 배상하면 된다. 이는 해상운송의 위험성을 고려해 선박소유자와 해상운송인을 보호하려는 장치로, 국제 해운 질서 속에서 자리 잡은 제도다.
그런데 계약서 문구 하나가 이 제도를 무력화할 수 있다. 하나의 화물 손상 사고와 관련해 발생한 두 건의 재판이 단적인 사례였다(서울중앙지법 2016가합 573743 판결 및 서울고법 2021나2010140 판결). 화주와 운송주선업자, 실제운송인으로 연결되는 운송 계약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사안이었는데, 화주와 운송주선업자 사이의 계약서에는 모든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문구가 기재돼 있었고, 실제운송인이 발행한 선하증권 이면 약관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실무상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백투백(back-to-back)의 계약 구조가 아니었다.
법원은 “모든 손해를 배상한다”라는 문구를 단순히 책임을 확인하는 내용이 아니라 운송주선업자가 책임 제한권을 포기하기로 한 특약이라고 해석했다(참고로 법원은 운송주선업자를 화주와의 관계에서 해상운송인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운송주선업자는 화주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책임 제한 주장에 실패해 손해를 배상할 수밖에 없었고(과실상계는 인정됐다), 실제운송인에 대한 구상 청구에서는 포장 불충분을 이유로 구상에 실패했다.
실제 사실 관계는 여기서 소개한 것보다 더 복잡했기 때문에 훨씬 다양한 쟁점이 존재했으나, 필자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운송주선업자가 무심코 계약서에 포함한 “모든 손해”라는 두 단어가 해상운송인의 최후 방패를 무너뜨렸다는 점이다.
상법상 인정되는 선박소유자 또는 해상운송인의 책임 제한권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상법 제769조 이하의 선박소유자의 유한 책임에 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상법 제797조의 포장당·중량당 책임 제한이다. 우리 대법원은 상법 제769조가 임의 규정이라는 점을 전제로 당사자의 합의가 있으면 전자의 책임 제한의 적용을 배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2013다61343 판결).
대법원의 판단은 없지만, 상법 제797조도 임의규정에 해당하고 해상운송인의 책임에 관한 특약은 해상운송인의 의무 또는 책임을 경감하거나 면제하는 경우가 아닌 한 유효하므로 후자의 책임 제한 역시 당사자의 합의로 포기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손해를 배상한다”는 문구는 책임 제한권의 포기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영국 법원은 “all and any damages”, “harmless”라는 문구만으로는 책임 제한권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적이 있다. 우리 법원과는 달리 더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 실무에서는 우리 대법원의 판단이 우선하므로 이에 맞춘 대비가 필요하다.
계약서는 최후의 책임을 결정짓는 마지막 증거
일상적으로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내가 모든 (손해를) 책임질게”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제 해운 실무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선박소유자 또는 해상운송인이 갖는 책임 제한권과 면책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구를 원칙적인 손해배상 책임의 부담을 규정하는 것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라면, 상법상의 책임 제한, 면책 규정은 그대로 적용된다는 등의 단서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형 화주와 계약을 체결하려는 운송주선업자는 더 주의해야 한다. 아무래도 갑(甲)의 지위에 있는 대형 화주와의 계약에서는 책임 제한권과 면책권을 포기하고, 실제운송인과의 계약에서는 해상운송인의 책임 제한권과 면책권을 그대로 두는 ‘비대칭 구조’가 발생하기 쉽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처럼 화주에게 전액을 배상하면서 실제운송인에게는 구상하지 못하는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반대로 화주 입장에서는 이러한 문구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고가 장비나 프로젝트 화물 운송에서는 “운송인은 발생한 모든 손해를 일체 배상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요구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조항과 문구의 의미를 두고 해석 다툼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계약 체결 당시의 정황과 당사자의 의도를 입증할 자료, 예컨대 이메일 교신 내역, 회의록 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계약 단계에서 모호한 표현을 피하는 것이다. 또한 영문 계약서와 국문 계약서가 함께 사용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대조해 번역 과정에서의 불일치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책임 제한권은 단순한 법 조항과 제도가 아니라 해상운송인의 최후 안전망이다. 그러나 이 안전망은 계약서의 한 줄 문구로도 무너질 수 있다. 필자가 소개한 사례가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계약서는 사업을 진행시키는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최후의 책임을 결정짓는 마지막 증거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계약서에 무심코 삽입한 문구 하나가 거액의 손실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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