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와 벨기에 해운왕 사이의 자존심 싸움으로 관심을 모았던 프런트라인과 유로나브의 통합이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노르웨이 유조선사인 프런트라인이 벨기에 동종선사인 유로나브 인수·합병(M&A)을 포기했다. 벨기에 창업주의 압박에 백기를 든 모양새다.
노르웨이 해운왕 욘 프레드릭센(John Fredriksen)이 이끄는 프런트라인은 지난해 7월 유로나브와 맺은 통합 계약을 해지한다고 현지 시각으로 지난 9일 밝혔다.
선사 측은 “유로나브와의 통합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며 “유로나브 주주들에게 자발적인 주식 교환을 제공하지 않고 벨기에 증권시장인 유로넥스트브뤼셀에 상장하는 목표도 없다”고 못박았다.
프런트라인 최고경영자(CEO)인 라르스 바르스타드(Lars Barstad)는 “두 회사는 독립적으로 대형 원유 및 정유운반선대를 보유하고 있고 이미 규모의 경제를 누리고 있다”며 “프런트라인은 효율적인 경영으로 지속적으로 가치를 추구하고 배당금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7월11일 노르웨이 선사는 유로나브와 합병 계약을 체결했다. 유로나브 주식 1주당 프런트라인 주식 1.45주의 비율로 주식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두 회사를 하나로 합친다는 내용이었다.
두 회사는 통합회사 이름을 프런트라인으로 정하고 유로나브의 휘호 더 스툽(Hugo De Stoop) CEO가 수장을 맡는 데 합의했다. 회사 지분은 유로나브 주주가 59%, 프런트라인 주주가 41%를 나눠 갖는 구조였다.
주식교환 절차가 마무리되면 소액주주의 주식을 강제 매입하는 스퀴즈아웃을 추진해 합병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었다.
통합이 이뤄지면 프런트라인은 시장가치 42억달러, 선단 144척을 가진 세계 최대 원유운반선사로 도약할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초대형 유조선(VLCC) 선단은 전 세계(850척) 선박량의 8%인 69척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아울러 본사를 현재의 버뮤다에서 키프로스로 이전하고 유로넥스트브뤼셀과 노르웨이 오슬로,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한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욘 프레드릭센은 2021년 9월 유로나브 지분 9.8%를 취득하고 당시 기준 최대주주로 올라서면서 유로나브와 프런트라인의 합병을 본격화했고, 지난해 4월 두 회사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최종 계약에 도달했다.
순조로울 것 같던 통합 작업은 큰 난관에 부딪혔다. 유로나브 창업주인 사베리스(Saverys) 가문이 합병 반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난 1995년부터 25년간 경영해 온 사베리스 가족회사 CMB(Compagnie Maritime Belge)는 유로나브가 경영난을 겪던 지난 2020년 4월 지분율을 5% 미만으로 낮추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욘 프레드릭센이 프런트라인과 합병을 추진하자 수억달러를 투자해 주식 재매입에 나섰고 결국 지난해 3월 10.08%의 지분을 확보하며 최대주주로 다시 올라섰다.
이후로도 주식 매입을 계속 이어가 합병 계약이 체결되던 지난해 7월 지분율을 20.28%로 늘리고 지난 연말 25%까지 끌어 올리며 합병을 스스로 저지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벨기에 공공인수합병법은 주주총회 참석 주주의 75%가 찬성해야 합병을 승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스퀴즈아웃은 주주 95%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사베리스의 반대 이유는 간명하다. 합병에 실익이 없다는 판단이다. CMB는 프런트라인과 유로나브의 통합 계약 체결 당시 발표한 성명에서 “프런트라인과 유로나브의 결합이 유로나브 주주들에게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믿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세계적으로 탈탄소가 가장 중요한 흐름이 된 상황에서 원유 수송에만 초점을 둔 유로나브의 현재 사업전략도 회의적”이라며 현 경영진에 녹색 에너지 사업 진출을 촉구했다.
▲욘 프레드릭센 프런트라인 소유주(왼쪽)와 마크 사베리스 유로나브 전 회장 |
욘프레드릭센, 합병계약 파기후 지분 5% 추가 매입
대형 유조선사 간 합병이 무산됐지만 이를 둘러싼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사베리스는 후속 조치로 합병에 찬성한 유로나브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를 물갈이할 계획이다. CMB는 지난 16일자로 유로나브 측에 감독이사회 이사진 5명 전원을 교체하는 내용의 주주총회 소집을 요청했다.
기존 감독이사회를 해체하는 대신 마크 사베리스 전 유로나브 회장을 포함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이사진을 새롭게 선임할 방침이다.
프레드릭센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뉴욕증권거래소에 따르면 프런트라인은 지난해 말 17.78%였던 유로나브 지분율을 이달 20일 현재 22.62%로 확대했다. 계약 파기로 유로나브 주가가 두 자릿수의 비율로 하락하자 1억4400만달러를 투자해 지분을 4.84% 사들이며 사베리스 가문을 바짝 추격했다.
프런트라인은 공시에서 지분 매입을 ‘투자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시장에선 사베리스의 이사진 교체 움직임에 대항하려는 조치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통합을 추진해 온 스툽 CEO 등 유로나브 현 경영진은 17일 프런트라인의 계약 해지 결정에 맞서 법원에 긴급 중재를 신청했다.
유로나브 경영진은 “일방적인 통합 철회 조치는 계약 조건에 위배되는 데다 프론트라인은 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합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계약이 당초 계획대로 이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합병의 불씨가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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