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스트 원티드맨(A Most Wanted Man/2014)’은 스파이 소설의 대가로 불리는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2008년 발표 동명의 원작을, 저자가 제작에도 참여하여 ‘안톤 코르빈(Anton Corbjin)’ 감독이 비교적 무난하게 영상화 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근년에 개봉된 스파이 스릴러 영화로서는 최고의 작품으로 호평받고 있다. 007시리즈나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 타입의 액션이나 스릴과는 사뭇 다른 장르란 점이 눈에 띈다. 정보 오퍼레이터들이 타깃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전개되는 색다른 스릴을 즐기려는 관객들에게 차원이 다르게 어필한 첩보물이다.
작품의 배경은 미 9·11테러 이후 테러리스트의 온상으로 급부상하여 전 세계의 정보기관이 예의 주시하며 관찰하던 독일의 함부르크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밀려들고 불법 체류자가 넘치는 이국적 항구도시, 컨테이너 박스가 쌓인 부두, 한밤의 지하철, 고풍스러운 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옥상 등 다양한 공간이 조명된다. 여기에 독일 정보부 비밀부서 소속의 팀장인 카운터테러리즘 오피서 ‘군터 바크만(필립 세이모어 호프만/Phillip Seymour Hoffmann)’이 주역 캐릭터를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다. 그가 체첸에서 함부르크로 밀입국한 체첸·러시아 혼혈 청년 ‘잇사 카르포프(그리고리 도브리긴/Grigoriy Dobrygin)’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갖 신경을 곤두 세우며 추적하는 데서부터 스토리는 전개된다.
제목이 보여주듯 어느날 난데없이 함부르크에 이름과 존재 모두가 베일에 싸인 ‘지상최대의 지명 수배자’ 혹은 ‘일급 지명 수배자’가 홀연히 나타난다. ‘레일라(데르야 알라보라/Derya Alabora)’ 부인은 짐을 들어준 보답으로 한 사나이를 자기 집에 들인다. 그 청년은 온몸이 상처로 얼룩져 있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해 보이는 무슬림 청년 잇사였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그를 보살피던 터키 출신의 모자는 결국 민권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특히 국적 없는 사람들의 망명을 도우며 정당한 신념의 관철을 위해 그 어떤 조직이나 세력과도 맞설 각오가 충만한 민권 여변호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이후 관계는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다.
잇사는 미모의 독일 좌파 여변호사 ‘애나벨 리히터(레이첼 맥아담스/Rachel McAdams)’를 통해 여러가지 도움을 받기도 하며 한편 그녀를 매개로 자신의 유산과 러시아 범죄자의 검은 돈을 관리하는 독일 은행의 영국인 행장 ‘토마스 브루(윌렘 대포/Willem Dafoe)’와도 접촉한다. 잇사는 러시아 군벌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액의 유산을 자기 소유로 상속받기 위해 불법 입국을 해서 신분을 감추고 지내지만 나중에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엄청난 거액을 자기 것으로 챙기기보다는 마땅한 곳을 찾아 기부하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터였다.
이를 눈치 챈 군터는 잇사의 기부 과정에 암암리에 개입해 겉으론 평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에 돈줄을 댄다는 의혹을 받는 무슬림 지도자이자 자선사업가며 저명 학자인 ‘파이잘 압둘라(호마윤 에르사디/Homayoun Ershadi)’의 정체를 밝히려는 야심을 진행시킨다. 그는 위험 인물을 발견하고도 즉시 체포하지 않는 대신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활동하게 한 뒤 결정적 순간에 윗선까지 확보하는 방법을 택한다. 몰락한 러시아의 장성 카르포프의 아들 잇사가 상속받을 거액의 돈을 미끼로 선박회사를 이용, 비밀리에 돈세탁을 하여 알케다에게 자금을 지원하려는 압둘라 박사 체포를 목표로 삼고, 잇사가 신뢰하며 도움을 받는 변호사 애나벨도 함께 끌어 들인다. 독일 최고의 스파이였으나 지금은 정보부 소속 비밀조직의 수장인 군터는 정보원을 미끼 삼아 더 큰 목표 인물을 찾아 제거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기에 인터폴 지명 수배자인 잇사가 처음엔 아버지의 유산을 찾을 목적으로 밀입국 하자 피라미를 미끼로 상어를 낚는 수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첫 목표는 관련된 인물을 일단 자신의 우군으로 포섭하는 일. 애나벨 변호사와 토마스 은행장, 심지어 파이잘의 아들 ‘자말 압둘라(메디 데비/Mehdi Dehbi)’에 접근한다. 계획대로 포섭된 아들 자말이 아버지 파이잘과 갈등을 일으켜 끝내는 배신토록 사주함으로써 그 종말이 살벌하다 못해 추악한 첩보전의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감시와 피감시, CCTV와 도청, 휴대전화와 USB 등 첩보영화 스릴러의 전형적 요소들을 모두 사용하면서도 액션이나 총격전, 살인, 고어(Gore), 섹스 장면 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편을 통해 고요히 밀도있는 암시적인 서스펜스로 진상을 파헤치고 단서를 풀어갈 뿐이다.
필자 견해로는 주인공 군트가 애인조차 없이 자기 일에만 함몰된 독신이자 허스키한 목소리와 체인스모커인 데다 업무 중에도 위스키를 입에 달고 살며 피아노 연주를 유일한 취미로 삼는 등 관객들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았을까 염려되기도 했다. “보다 안전한 세상을 위해”를 삶의 목표로 삼는 군터에게 애나벨은 품고 싶은 여자다. 그러나 사랑할 순 있지만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남자가 갖는 것도 안된다고 토로한다.
동료 ‘이르나 프레이(니나 호스/Nina Hoss)’가 그녀를 보며 키스 시늉을 한 후 애나벨 대신 군터를 바라보고 “한 여자가 청첩장을 보낼 때마다 다른 한 여자는 실패의 쓴 맛을 맛본다”는 독백과 함께 한숨을 쉬는 정도의 장면에서 첩보활동 가운데서도 실행은 어렵지만 사랑의 감정이 잠복하고 있음을 엿볼 수는 있다.
또, 존 르 카레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에서도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주인공이 원하는 결말에도 도달하지 않고 애나벨이 원하는대로 군터는 잇사에게 독일 여권을 발급받아 주고 파이잘의 신병을 확보하여 대단원에 이르려 하지만 라이벌인 ‘디터 모르(라이너 보크/Rainer Bock)’가 미국 대사관의 첩보 담당 ‘마사 설리번(로빈 라이트/Robin Wright)’과 결탁하여 어처구니 없게도 집요하게 쌓아온 군터의 공로를 잽싸게 인터셉트하고 만다.
앞서 다른 사건서 실패한 미국은 영향력 만회를 위해 다시 개입, 그간 군터의 노고와 결실을 결정적 순간에 낚아채 잇사와 파이잘은 체포되고 군터는 허무하게 텅 빈 손으로 자괴한다.
잇사를 두고 독일 첩보기관, 민권 변호사 애나벨, 미국 첩보기관 사이의 심리전과 군터의 과거 작전 실패로 인한 부담감, 선임자로서의 책임감, 장기간 감시에 대한 초조감이 이렇게 마지막 반전으로 끝나자 군트는 피라미로 상어를 낚으려다 자신이 되레 상어를 낚는 미끼가 된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액션 첩보물은 아니지만 군터가 사회적으로 촉망받고 인정받는 파이잘의 강연을 듣고 나서 자신이 지휘하는 조직내에서 테러리스트였던 잇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아들 자말을 통해 파이잘이 키프로스 거점 테러 집단의 사령관임을 짐작하고 각국 정보부의 용의선상에 오른 그를 체포할 은밀한 작전을 설계하는 장면을 스타트로 계속 무슨 일인가가 곧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마지막까지 계속돼 가슴 졸이던 기억에 필자는 지금도 바싹 입술이 마른다.
우리에겐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로 알려진 영국 첩보기관 MI6 출신의 원작자 존 르 카레의 소설은 안소니 홉킨스, 다이앤 키트, 피어스 브로스넌, 개리 올드만 등 세계적 유명 스타들이 출연해 영화화된 작품들이 즐비하다. “오늘날 함부르크는 고도의 치안이 유지되는 도시이며 2001년의 과오를 절대 반복하지 않으려는 독일과 국제 안보기관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자막으로 시작되고 엔딩 크레딧에서도 촬영 후 46세를 일기로 타계한 필립 호프만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막이 삽입돼 화면이 끝나고도 필자를 숙연케했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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