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9 09:11

“선박 수주하면 뭐하나” 국내조선, RG 발급거부에 속앓이

국내해운업계, RG 발급 잘되는 해외조선 눈돌려

수년째 내리막을 걸었던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최근 모처럼 상승세로 돌아섰다. 바닥을 친 선가가 점차 반등할 것으로 판단을 내린 선주들이 조선사와 잇따라 건조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전년 대비 발주량이 늘어난 덕에 국내 대형조선사들은 수주잔고 목록을 추가하게 됐다. 일감가뭄을 해갈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수주 낭보가 잇따라 들려오고 있는 건 조선사들에게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중소조선사들에겐 이런 소식이 먼 나라 얘기다. 조선 불황 이후 금융기관이 RG(선수금 환급보증) 발급을 꺼려 모처럼의 수주실적을 날리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벼랑 끝에 선 조선사들을 돕기 위한 정책들이 마련돼 있지만 이마저도 큰 효과가 없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조선 불황 여파에 RG 발급기준 강화

국내 조선사에서 선박 수주에 성공하고도 RG를 마련하지 못해 수주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건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RG는 조선사가 파산하거나 배를 제때 건조하지 못했을 때 선주가 조선사에 지급한 선수금을 은행이 대신 물어주는 지급 보증이다.

금융권에서 RG 발급을 원할히 하겠다고 최근 선언했지만 이는 대형조선소에 불과한 실정이다. 은행들이 RG 발급을 거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업 불황 때문이다. RG 발급이 이뤄졌지만 조선소가 파산하면 은행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 대우조선해양 사태로 금융기관들은 국내 조선사들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RG 발급 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RG 발급이 막힌다는 건 수주량 감소로 이어져 결국 국내 중소조선사들의 존폐를 좌우한다. 따라서 일감 증발로 한 척의 건조계약이 절박한 중소조선사들 입장에서 RG 발급은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 현재 눈앞에 있는 건조계약을 놓치면 당장 내년에 건조 물량이 없는 조선소가 수두룩하다.

국내 해운·조선업의 수발주 환경은 더욱 팍팍해졌다. RG 발급은 중소형 화물선을 건조하는 업체들 입장에서는 녹록치 않은 과제 중 하나다. 또 선박 구입 계약시 선박 인도시점에 전체 대금의 60~70%를 지급하는 헤비테일방식으로 인해 중소조선업체들의 자금난은 한층 심각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한진해운 법정관리 이후 해운조선을 싸그리 묶어 어렵다는 인식을 금융권에서 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노후화된 연안선박의 현대화를 위해 마련된 이차보전사업이 중소조선사들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하는 것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기존 노령선을 폐선하고 선박 현대화를 위해 선사가 자국 조선소에 선박을 짓게 한다는 취지는 분명 좋은 일이다. 정부는 올해 이차보전사업 1차 공고 뒤 총 27척에 대한 사업자 선정을 완료했다. 약 2066억원을 승인한 셈이다. 하지만 해운조선 불황을 이유로 금융권에서 RG 발급을 꺼리자 조선사들이 난항을 겪고 있다.

일부 해운사들도 조선사들의 RG 발급이 어려운 탓에 중국으로 선회해 선박을 발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건조 일감을 자국 조선소에 맡기는 중국 일본과는 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것.

국내 한 중견선사는 한진해운 법정관리 사태 이후 선박금융이 상당히 까다로워 졌다고 한다. 이 선사는 주로 국내 중견조선사에 신조 발주를 해왔다. 중국에 비해 선가는 높지만 우리나라가 품질에서 앞선다는 게 주된 발주 배경이다.

해운사들은 신조를 진행하면 국내 조선사에 발주하겠지만, RG 발급이 어려워지면 상황이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나라 조선소로 가야할 일감이 해외로 빠지며 해사클러스터를 작성해 상생해야할 국내 해운조선업이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다. 서로가 이득을 보고 상생·발전하고 있는 일본 정책 방향과 역행하는 꼴이다.

5개시도 대정부 공동건의문 채택

업황 침체를 보다못한 조선밀집지역 5개 시·도는 결국 위기극복에 팔을 걷어붙였다. 부산 울산 전북 전남 경남 시·도는 지난달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대정부 공동건의문을 중앙기관에 전달했다.

건의문에는 ▲관공선 교체(LNG추진선〕추진 국비 지원 ▲중소형조선소 RG(선수금환급보증) 발급 지원(완화) ▲조선업특별고용지원업종 지정 및 조선업희망센터 연장 ▲조선업 구조조정 지원 특례보증 확대 ▲정부 정책자금 상환유예 및 만기연장 지원  ▲조선업 보완 지역 먹거리산업 육성 지원 확대 ▲조선업 사업다각화 집중지원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5개 시도는 이중 관공선 교체에 대한 국비지원과 RG 발급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31일에는 해수부 산업부 기재부 고용노동부 등을 방문했으며, 이달 초에는 산자부에서 주관한 산업분과위원회에 참석해 애로사항을 전달했다. 이에 정부는 올해 추가경정예산을 투입해 위기에 직면한 조선사들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조선사들은 정부가 중소형기업들을 위한 별도의 파이낸싱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000억~2000억원의 자금이 별도로 조성돼 기업들에게 골고루 분배된다면 중소조선업계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금융권에서는 몇백억원이나 되는 금액을 섣불리 중소조선사들에게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10억원의 자본금도 보유하지 못한 기업들에게 금융지원이 오히려 화살로 되돌아올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형조선사에 지급되는 1조~2조원과 비교하면 10%도 안 되는 금액을 5%만 해줘도 몇개 기업들이 생존할 수 있다”라며 “다시 돌아올 호황을 대비해 조선소들의 숨 쉴 구멍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 최성훈 기자 shchoi@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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