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선박의 몸집은 해운기업을 평가하는 가늠자가 됐다. 서비스 개선과 차별화된 영업전략은 실종되고 오로지 선박 크기와 운임만이 선사들의 경쟁력을 규정하는 식으로 통념화되고 있다.
2008년 이후 도래한 시장 위기를 선박 대형화를 통해 극복하려는 선사들의 시도는 올해 들어 2만TEU짜리 선박의 발주 경쟁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프랑스 CMA CGM이 2만600TEU급 컨테이너선 3척을 한진중공업에 발주했으며 홍콩 OOCL과 일본 MOL은 삼성중공업에 2만1000TEU급 선박을 각각 6척과 4척씩 주문했다. 대만 에버그린은 용선 형태로 일본 이마바리조선소에 2만TEU 선박을 11척 발주한 상태다.
아울러 스위스 MSC가 용선을 통해 현대중공업에 동급 선박을 확정 2척, 옵션 2척을 발주했으며, 덴마크 머스크라인은 6월 초 2만TEU 선박 11척을 신조하는 계약을 현대중공업과 체결했다. 이들 극초대형선들은 2017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에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 글로벌 선사들이 초대형선박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박의 몸집을 키워 비용경쟁력에서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의도다. 만성적인 저운임 시황 하에서 규모의 경제 실현을 통해 비용절감과 수익개선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선박 대형화의 불을 지펴온 덴마크 머스크라인은 초대형선 도입의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이 선사는 올해 1분기에 8000억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을 달성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비용 경쟁력을 해운업계에 과시했다.
‘독과점적 지배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선두 기업들의 숨은 속내도 선박 대형화 경쟁에 녹아 있다. 경쟁력 없는 선사들에 대한 ‘솎아내기’를 통해 소수의 기업이 고수익을 창출하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계산이다.
아울러 해외선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박 몸집이 작은 양대 국적선사들도 하루빨리 초대형선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조바심 어린 조언들도 포착된다. 한국 선사들이 초대형선 확보에 뒤처질 경우 선두기업들과의 원가경쟁력 격차를 해소하지 못해 무한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극초대형선 경쟁에 대한 우려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세계 유수의 해운조사기관인 IHS의 리처드 클레이턴 수석연구원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 선사들의 극초대형선 경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극초대형선 신조는 선사들의 이익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 단순한 경쟁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란 견해다. 그는 한국선사들에게 사업 규모에 맞게 선박 도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전형진 연구원은 “초대형선박을 가진 선사들이 독과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독과점적 지위가 충분한 수요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공급과잉이 심각한 현 시장 상황에서 초대형선을 통한 독과점적 영향력 행사가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인천대 양창호 교수도 컨테이너선 대형화를 통한 규모의 경제 효과는 신기루라는 시각을 보였다. 초대형선으로 가장 많은 규모의 경제 효과를 내야할 신조선가와 연료비가 실제로는 선박의 대형화와 비례하는 데다 오히려 선박비용의 21%를 차지하는 항만 및 터미널 요금은 상승하는 '규모의 비경제 효과'가 나타났다는 근거다. 게다가 컨테이너비와 유지보수비, 내륙운송비, 컨테이너 재배치비 등 선박비용의 56%는 컨테이너선의 대형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양 교수도 초대형 컨테이너선 경쟁은 경제적인 분석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선사간의 시장점유율 경쟁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클레이턴 연구원과 비슷한 진단을 내렸다.
전문가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비록 사이즈는 작더라도 친환경 설계를 통해 연료비 절감을 도모하고 시장에 특화된 선박 도입에 힘을 쏟는 게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척박한 해운시장 환경에서 높은 부채비율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해운기업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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