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상승이 해운업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 후행산업인 조선업계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겠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조선소들이 상선만을 건조하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유가상승, 잠자던 드릴십 시장 깨우다
높은 유가는 드릴링 컴퍼니들의 드릴십 발주 심리를 자극했고 그 결과 올해 현재까지 드릴십은 총 22척(옵션 5척 포함)이 발주됐다. 올해 발주된 22척의 드릴십들은 국내 빅3와 모두 신조 계약을 체결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세계 1위, 타도 한국을 아무리 외쳐도 고부가가치선 수주 실적을 보면 향후 판세를 예측할 수 있다”며 “갈수록 단순 선종이 아닌 고부가가치선종으로 발주 양상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상대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최근의 유가상승으로 인해 해양플랜트의 발주가 늘면서 올해 국내 조선업계 빅3는 쾌속질주 중이다. 국내 조선업계는 올해 1분기 전 세계 수주량인 630만CGT의 52.3%인 90척, 약 330만CGT를 수주했다. 발주된 전체 선박 가운데 5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195만CGT를 수주하는데 그친 중국을 압도하는 양상이다. 우리나라 조선업계가 지난 1분기 중국을 상대로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더딘 회복을 보이고 있는 BDI 지수로 인한 벌크선 신조시장 축소와 유가상승으로 인한 해양플랜트 발주 증가가 주 원인이다. 올 초 SPP조선과 성동조선해양 등 중견조선사들이 중국 조선사와의 경쟁에서 선전을 펼친 점도 중국을 따돌리는 데 한 몫 거들었다.
해양플랜트 가운데 최근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선박은 ‘드릴십’이다. 드릴십은 기술집약적인 고부가가치선박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선종 중 하나다. 세계적으로 드릴십 시장을 국내 빅3가 독식하다시피 하는데는 이 같은 점이 작용했다. 기본적으로 대형 프로젝트인데다 발주 조건이 까다로워 선박건조기술과 해저시추기술을 동시에 갖추지 못한 조선소는 수주 자체가 불가능하다. 업계 관계자는 “드릴십 시장은 현 시점에서 가장 각광받는 시장이긴 하지만 시장 진입에 따른 기회비용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쉽게 입성할 수 없는 분야 가운데 하나”라며 “요즘 같은 유가시대에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들은 하루에 20만달러 수준의 원유를 시추하고 있어 드릴십 발주가 크게 늘고 있다”고 드릴십 시장의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작년까지의 드릴십 시장에서는 삼성중공업이 리더 역할을 했다. 삼성중공업은 작년 세계 드릴십 시장에서 50%를 상회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2000년대 실적을 살펴보더라도 2000년대 발주된 69척의 드릴십 중 40척을 수주하며 58%의 점유율을 기록한 바 있다. 삼성중공업의 상선을 기반으로 한 드릴십은 도크 폭이 좁은 삼성중공업 조선소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드릴십 시장, 절대강자 없는 3파전 ‘난형난제’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변했다. ‘드릴십 종가’ 삼성중공업이 쌓아온 그동안의 아성이 위협받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고유가 수혜 선박인 드릴십 시장에서 경쟁상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올해 현재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각각 9척(옵션 3척 포함)과 7척(옵션 2척 포함)의 드릴십을 수주하며 드릴십 판도를 새롭게 쓰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세부 옵션 사항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어 현재 6척(옵션 미포함)의 드릴십을 수주한 것으로 집계된 상태다. 현대중공업은 올 초부터 공언한대로 공격적인 수주영업을 앞세워 드릴십 시장에 거센 파고를 일으키고 있으며 대우조선해양도 선전을 펼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까지 선가 상승을 관망하며 적극적인 수주 영업에 나서지 않았다. 지난해 전체 매출의 65%를 비조선 분야가 점유하며 종합중공업회사로의 성장에 보다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 수주잔량 부문에서 삼성중공업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주고 대우조선해양에도 밀리는 등 조선업 분야에서 뒤처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수주잔량이 적은 점이 올해엔 선주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서고 있다. 빈 도크들이 빠른 납기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듯 현대중공업은 4월 현재 조선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총 34척, 92억달러의 수주 실적(현대삼호중공업 포함)을 기록하며 2011년 수주목표 198억달러의 46%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중공업의 드릴십은 ‘세계 유일의 드릴십 전용 설계’를 통한 최적화를 강점으로 삼는다. 빅3 가운데 가장 늦게 드릴십 시장에 진출했음에도 불구, 오랜 기간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한 조선소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최적화를 통해 유지비 절감 뿐 아니라 효율적인 연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 선주들에게 어필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드릴십이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 시기는 지난 2010년 11월이다. 현대중공업이 최초로 건조한 드릴십인 <딥워터 챔피언>호가 미국 소재 트랜스오션사에 인도되며 시장에 빠른 속도로 현대중공업 드릴십의 명성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트랜스오션은 세계 1위 시추업체이자 전체 드릴링 컴퍼니 가운데 세계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석유, 천연가스 공급 기업이다.
대우조선해양의 드릴십 진입은 ‘반잠수식 시추선’에서 비롯됐다. 대우조선해양은 1980년대 초기부터 넓은 도크 폭을 이용해 건조하기 시작했던 반잠수식 시추선 분야에서 강세를 보여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된 노하우들은 비슷한 원리를 이용한 선박인 드릴십 시장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시장 진출에 있어 존재하는 시행착오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또 선주들 역시 반잠수식 시추선 건조의 기술력을 익히 인지하고 있어 드릴십 발주에 있어 대우조선해양의 메리트로 작용했다.
지난 2006년 트랜스오션으로부터 최초로 드릴십을 수주해 2009년 성공적으로 인도한 바 있는 대우조선해양의 <디스커버러 클리어 리더>호는 동시에 2개의 시추작업이 가능한 ‘듀얼 드릴링’ 설비가 장착돼 ‘차세대 드릴십’이란 호평을 받기도 했다. <디스커버러 클리어 리더>호는 트랜스오션의 기념적인 100번째 발주 선박으로 업계의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2000년 전 세계 시장에서 발주가 중단된 지 5년만인 2005년에 세계 최초로 ‘극지용 드릴십’을 수주해 성공적으로 인도하며 드릴십 분야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삼성중공업의 드릴십은 갈수록 까다로워지는 선박 환경규제에 발맞춰 전기추진방식을 통해 해역을 이동하기 때문에 경제성과 친환경성이 뛰어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삼성중공업이 자랑하는 다이내믹 포지셔닝 시스템(DPS)은 높은 파도와 강풍이 상존하는 해상에서 자동으로 선박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첨단 위치제어 시스템으로 명성이 높다. 지난 2008년에는 스웨덴 스테나사로부터 국내 조선업계 사상 최고인 9억4200만달러 규모의 드릴십 1척을 수주하기도 했다.
올해 드릴십 시장의 판도는 안개정국이다. 치열한 수주경쟁 속에서 유례없는 난타전이 전개되고 있다. 디펜딩 챔피언인 삼성중공업의 수성, 가장 늦게 시장에 등장한 현대중공업의 선전, 독창적인 기술 메리트를 앞세운 대우조선해양의 추격이 드릴십 시장의 유래없는 3파전을 이끌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시장을 지켜보고 있다.
한 중견조선업체 관계자는 “드릴십을 사이에 두고 빅3가 자존심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며 “고유가 시대에 큰 수익원인 드릴십 시장에서 STX조선해양과 같이 기술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주실적과 인지도에서 뒤처지는 조선사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황태영 기자 tyhwang@ks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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