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선주자들이 연일 쏟아내는 일자리 창출 공약(空約)을 듣다보면 유안진 시인의 ‘밥해주러 간다’라는 시(詩)가 새삼 우리, 구경꾼들의 가슴을 친다.
밥해주러 간다
적신호로 바뀐 건널목을 허둥지둥 건너는 할머니
섰던 차량들 빵빵대며 지나가고
놀라 넘어진 할머니에게
성급한 하나가 목청껏 야단친다
나도 시방 중요한 일 땜에 급한 거여
주저앉은 채 당당한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뭔 중요한 일 있느냐는 더 큰 목청에
취직 못한 막내 눔 밥해주는 거
자슥 밥 먹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뭐여?
구경꾼들 표정 엄숙해진다.
이 세상 태초로부터 흘러온 물길, 다시 저 태허(太虛)로 흘러가 닿는 생명의 물길! ‘모성’이라 거니 ‘사랑’이라 거니 ‘아가페’라거니 하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겹겹의 감격이 거기에는 있다. '자식 밥 먹이는 일'이 모든 일의 우선이며 많은 사람이 자식 밥 먹이기 위해 길 위에 있다.
‘밥해주러 간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도 실은 없다. 못나고 부족한 자식은 더 마음이 쓰인다. 실제로 못나고 부족한 것이 아니지만 세상의 해괴한 잣대는 그렇게 서열 지어 묶어 놓는다.
‘취직 못한 막내 눔’이 점점 많아진다. 서둘러 적색 신호등을 건너는 할머니도 많아진다. 눈물은 “입이 말할 수 없는, 마음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래서 설명하기보다 그냥 흘려버리는 게 더 쉽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겐 흘릴 눈물조차 없다.
지난달 전체 취업자는 작년 10월보다 39만6000명 늘었고, 10대부터 60세 이상까지 각 연령대별 취업자는 모두 증가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20대 취업자 숫자만 1년 전보다 9만4000명 줄었다.
20대 고용률도 2009년 3월 이후 43개월 만에 최저 수준인 57%로 떨어졌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20대 중에서도 20~24세 취업자는 7만7000명 늘어난 반면 25~29세 취업자는 17만1000명이나 줄었다는 점이다.
최근 기업들이 고졸 채용을 늘리면서 대학 졸업자들의 취직 문이 더 좁아진 것이다. 경제 침체 여파로 500개 상장 기업 중 내년에 채용을 줄이거나 동결하겠다는 기업이 64%에 달했다. 고용을 늘리겠다는 기업은 7.6%에 불과하다.
20대 전반부와 후반, 고졸자와 대졸자의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 특히 경제 분야에선 어느 누군가에게 혜택이 돌아가면 반드시 사회의 다른 편에선 그만큼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든 계층, 모든 직종에 혜택이 돌아가는 만능 처방은 없다.
그런데도 대선 후보들은 청년 취업 문제와 중·노년의 재취업과 정년 연장을 한꺼번에 해결해줄 듯한 정책 상품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대기업과 공기업을 대상으로 정원의 3~5%까지 청년 고용을 의무화하겠다고 했고, 안철수 후보도 대기업·공기업이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청년 채용을 늘리도록 특별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선 후보들 모두 은퇴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에게 정년 60세를 법으로 못 박겠다고 했고,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단계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기업을 강제하면 기업은 신규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청년 취업은 바늘구멍처럼 더 좁아지게 된다. 후보들은 중·장년층 일자리를 먼저 챙기면 청년들 취업 기회는 줄고, 정규직 채용을 강요하면 아르바이트와 인턴 자리만 늘어나게 된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국내외 유수한 경제학자들은 향후 10년간 세계적인 저성장기에 접어 들어다는 전망들을 쏟아내고 있고, 우리 경제는 세계경제 성장률에도 크게 못 미치는 침체 국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성장률이 1990년대 6%대에서 2000년대 4%대로 크게 떨어졌다. 문제는 앞으로 성장세가 다시 한 단계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금년 우리나라 2.8%성장도 낙관이라는 전망들이 우세하다.
가장 큰 요인은 인구구조의 변화이다. 우리나라의 생산가능인구는 2016년을 정점으로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노인인구 1인당 생산가능 인구도 2012년 6.5명에서 2020년에는 4.5명, 2030년에는 2.6명으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 고령화와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 투자율의 추세적 하락을 감안할 때 자본의 추가적인 투입을 통한 성장률 제고도 어려워지고 있고 지식의 축적과 혁신을 통한 생산성 증가도 여의치 않다.
더구나 세계경제 위축으로 성장 동력 역할을 해온 수출에 적신호가 켜졌고, 안으로는 과도한 가계부채 문제가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나 일본처럼 자산 가격 하락이 진행되면 소비가 더 얼어붙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가계부채가 향후 5년간 25% 줄어들 경우 민간 소비가 연평균 1.4%포인트 감소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자영업의 부진은 가계부채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자영업자는 주택담보대출을 이용해서 창업하는 경우가 많아 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부담이 26.6%에 달한다. 임금근로자의 두 배 수준이다.
그간 우리나라는 수출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내수는 동력을 상실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이후 민간소비 증가율은 GDP 성장률보다 1%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에 머물러왔다. 이런 상황에서 유로존 재정위기가 장기화하거나 미국, 중국의 성장률이 급락하며 가계부채와 자영업 문제까지도 불거지면 우리 경제는 세계경제 성장률에도 크게 못 미치는 침체 국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경제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 일자리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세대간,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일자리를 어떻게 배분하고 조정할 것인지가 고용 정책의 최우선 과제다. 후보들이 여기서는 청년 취업을 약속하고 저기서는 중장년 정년을 연장해주겠다는 식의 공약은 진실을 덮는 눈가림에 지나지 않는 표(票)동냥 짓거리다.
다시 말해 저성장 시대에는 모든 계층·직종 혜택 주는 ‘온돌’식의 일자리 처방전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온돌문화는 민족의 역사와 기원을 같이하며 오늘에까지 계승된 대(大)전통이다. 예찬을 하자면 끝도 없다. 밥을 짓다 보면 구들장이 절로 덥혀지기에 취사와 난방을 함께 해결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겨울엔 등 따습고 여름엔 시원하니 인간 친화적이다.
방 밖 아궁이에 불을 때기에 연기와 그을음이 없는 방안은 청결하기까지 하다. 특유의 좌식문화와 흰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도 그래서 가능했다. 그러나 근대의 개막과 함께 전국의 인구와 도시가 늘어나면서 아궁이가 토해내는 연기만큼 산야는 민둥산이 되어갔다. 전쟁의 화마가 산야를 불태우던 1952년 정부는 연탄 보급에 팔을 걷어붙였다.
박완서의 수필 ‘50년대 서울거리’의 한 구절이 증언하듯 “부엌에서 온종일 물이 끓고 필요할 때면 언제나 불을 쓸 수 있는 연탄아궁이는 나일론 양말 못지 않은 복음이었다.” 그러나 재앙도 함께 왔다.
1968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는 “서울시장이 제독(除毒)연탄 발명자에게 사례금을 걸었다”고 보도했다. 연탄 난방비율이 75%에 달한 1960년대 아궁이는 한 세기 전의 ‘호환·마마’보다 더 우리를 떨게 했다. 동치미 국물을 들이켜는 것 외에는 치료법이 없던 당시 해마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70만 명 중 3000명이 넘는 이가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1969년 고압 산소장치가 나오면서 많은 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지만 1974년에도 서울에서만 연탄가스 중독자가 19만8000명에 이르렀고 그 중 850명이 사신(死神)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기름과 가스보일러가 대중화되면서 겨울철이면 신문 사회면을 채우던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사망을 알리는 비보는 사라져갔다. 그러나 지금도 연탄을 때는 가구가 28만이나 된다는 소식과, 불청객에 중독되는 사고도 2000건에 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아랫목 따듯하고 윗목까지도 따스운 ‘온돌’같은 일자리 창출은 없다. 경제가 성장해야만 가능하다. ‘가난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함을 걱정한다(不患貧而患不均)’는 공자 말씀을 되새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