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국민에게 폭포수 같은 시원함을 선물해 준 런던올림픽이었다.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열정과 성과가 자랑스럽고 고맙다. 런던 올림픽에서 금13, 은 8, 동 7 개로,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5위를 달성했다. 금년 6월7번째로 가입한 해에 20-50클럽 7개국 중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을 제치고 말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간다’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말이 코리아의 저력을 잘 대변해 준다. 대한의 젊은이들이 국운 상승의 희망을 국민 가슴에 아로 새겨준 행복한 여름이었다.
광복 후 처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가한 1948년 14회 런던올림픽에서 우리는 동메달 2개를 따내 59개 참가국 중 32위였다. 당시 선수단의 공식 명칭은 ‘조선 올림픽 대표단’이었다. 일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됐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런던서 돌아오는 길에 대한민국의 탄생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때 우리는 1인당 소득 75달러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로부터 64년 만에 런던서 다시 열린 올림픽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205개 참가국 중 정상급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오늘의 성취를 이룩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쾌거이기에 더욱 대견하다.
런던에서 한국 스포츠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프론티어 코리안’의 등장으로 더욱 환호했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로 세계 체조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던 양학선(20·한체대), 리듬체조에 몇 종목이 있는지도 잘 몰랐던 수많은 국내 팬을 TV 앞에 불러 모은 리듬체조의 손연재(18·세종고), 비인기도 아닌 ‘무관심 종목’ 대접을 받으면서도 올림픽 결선에 오른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의 박현선(24)·박현하(23·이상 K워터)자매,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한국 신기록을 세운 남자 50km 경보의 박칠성(30·삼성전자), 남자 역도 94kg급 김민재(29·경북개발공사). 현란한 스텝과 손기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한국형 펜싱으로 본고장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펜싱 선수단도 한국 스포츠의 지평을 넓힌 개척자들이다.
“‘고원훈(高元勳) 장덕슈(張德秀)씨 외 슈십명의 발긔한 됴션톄육회(朝鮮體育會)에서는 금일 오후 팔시 리문동 중앙례배당에셔 발회식을 거행한다더라.’(1920년 7월 13일자. 이하 조선일보) 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의 탄생을 알린 기사였다. 1919년 2월 일본인 중심으로 일본 체육회 조선지부 격인 조선체육협회(朝鮮體育協會)가 발족하자 이에 맞서 조선 체육계 인사들이 뭉친 것이다.
체육회는 첫 사업으로 당시 최고 인기였던 야구 대회를 기획,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11월 4일부터 사흘간 치르기로 했다. 첫 대회엔 휘문·경성·중앙·보성·배재 등 경성 시내 5개 학교가 참가, ‘됴션의 유사 이래 처음 되는 됴션사람의 야구대회’를 열었다(매일신보 1920년 11월 2·6일자). 사흘로 예정된 경기는 하루 만에 끝났으나 이듬해부터 평양·대구 등 지방에서도 참가하면서 전국대회로 확대됐다.
아시안게임의 모태인 ‘극동경기대회’와 ‘올림픽’ 등 국가 대항전의 예선전은 체육협회가 주관했음에도 체육회는 1921년 2월 제1회 전조선 축구, 10월에 정구, 1924년 6월 육상, 1925년 1월 빙상 대회 등을 잇달아 독자 창설하면서(1921년 2월 11일, 1938년 7월 6일자 등) 조선의 스포츠 토대를 구축해 나갔다.
체육회 창립 10주년을 맞은 1929년엔 야구와 정구·육상 3개 종목 경기를 경성운동장에서 동시 개최하는 ‘종합대회’로 치르면서 ‘제10회’라 이름 붙였다(1929년 6월 13일자). 첫 주관 대회인 ‘전조선 야구’를 기점으로 삼아 횟수를 정한 것이었다. 이어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 기념 종합경기대회’란 이름이 붙은 15회 땐 축구와 농구가(1934년 11월 6일자), 16회 땐 무도와 역기·씨름·럭비가 추가돼 9종목을 겨루는 ‘완연한 올림픽의 축도(縮圖)’로 대회를 치렀다.(1935년 9월 27일자 등).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우승한 1936년 17회 대회는 13개 종목을 겨루는 ‘스포츠 조선의 올림피아드’로 치렀고, 체육회엔 ‘반도 운동계로 하여금 오늘의 영예를 엇게한 총본영’이라는 찬사가 주어졌다.(9월 11·17일자)
전 조선을 열광시킨 ‘종합경기대회’는 1937년 18회 대회까지 열렸으나, 1938년 일제의 압력으로 체육회가 해산돼 체육협회에 흡수되면서(7월 5일자)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광복 후 부활된 조선체육회는 1948년 런던올림픽 직전 이름을 대한체육회로 바꿨고(1948년 9월 8일자), ‘종합경기’는 이해 10월 20일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신정부 수립 경축 겸 제29회 전국체육대회’란 이름으로 복원되어(10월 9일자), ‘올림픽 꿈나무’의 산실로 성장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선각자들과 체육관련 인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이어져 온 역사였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도 많은 한국 선수와 올림픽 관계자가 눈물을 흘렸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을 수 있다. 슬퍼서, 억울해서, 힘들어서, 아쉬워서, 분해서, 아니면 기뻐서…. 저마다 그런 감정의 깊이에 따라 색깔의 농도도 달라질 것이다.
‘우생순’의 신화를 이어가려다 4위에 그친 여자 핸드볼 선수들은 수많은 색깔의 눈물을 코트에 쏟아냈다. 처음엔 넘기 어려운 상대를 이긴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았고, 나중엔 딸 수 있었던 메달을 부상과 체력 저하에 발목이 잡혀 놓친 분한 감정 때문에 펑펑 울었다. 눈물을 모를 것 같았던 ‘싸움닭’ 강재원 감독은 선수들의 우는 모습을 보곤 자신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결국 눈물을 쏟았다.
리듬체조에서 5위를 차지하며 신기원을 세운 손연재는 보완할 부분이 생겨서 울지 않겠다더니 "귀국하면 뭘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만 눈물을 쏟아냈다. 18세 이 여고생은 그동안 부모의 곁을 떠나 혼자 외국을 돌면서 뼈를 깎는 훈련을 치르는 과정에서 많은 외로움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억울함에 못 이긴 눈물도 있었다. 펜싱 여자 에페 개인전에서 1초를 남겨두고 승리 직전까지 갔다가 주최 측의 서투른 경기 진행으로 역전패를 당한 신아람은 ‘1년보다 길었던 1초’에 항의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눈물로 대신 쏟아냈다. 항의의 표시로 한 시간 동안 혼자 피스트(piste·펜싱 경기장)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그는 그 시간이 올림픽을 준비해 온 4년보다 더 길었다고 했다. 펜싱 여자 플뢰레 금메달 후보로 꼽혔던 남현희는 베이징에 이어 또다시 이탈리아 여(女)검객에게 역전패를 당하며 메달을 눈앞에서 놓치고 나서 분통의 눈물을 흘렸다.
남자 유도 90㎏급 송대남이 금메달을 따내고 매트에 떨어뜨린 눈물의 색깔은 기쁨이었다. 쿠바 곤살레스를 연장에서 꺾은 뒤 환하게 웃음 짓던 그는 잠시 후 정훈 감독을 얼싸안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정훈 감독은 그에게 스승이자 동서였다. 유도를 그만두려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고 한계까지 다그치던 은인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신세대 총잡이’로 불리는 진종오는 사격 50m 권총에서 마지막 한 발로 동료 최영래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고 나서 울컥했다. 2관왕의 기쁨과 함께 금메달을 놓친 최영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그 눈물 속에 담겨 나왔다. 한쪽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레슬링 금메달을 따낸 김현우의 눈물 속엔 태릉선수촌의 지옥훈련을 견뎌내고 부상 핸디캡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른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어디 선수들뿐이겠는가. 사상 최약체(最弱體)로 평가됐던 여자 양궁 대표팀이 단체전에서 승리한 뒤 언론사와 회견하던 장영술 총감독은 갑자기 말문을 열지 못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강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 속에 자신의 고민을 말도 못하고 꾹꾹 가슴 속에 담아놓아야 했던 4년의 세월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서였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꼭 하나 있다. 눈물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그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다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보답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4년 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말이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